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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스타그램]얼굴의 바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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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먼드 윌슨의 철학책 『핀란드 역으로』(이매진)에는 유럽 근대 철학자들의 흐린 얼굴 사진이나 그림 들이 글 사이에 기념 우표만 한 크기로 실려 있고, 윌슨은 이 사진 속 철학자들의 얼굴에 대해서도 글로 묘사해 놓았다. 그 묘사가 그들의 얼굴 생김새보다는 주관적 느낌으로 정리되는데, 그 표현이 당사자들의 개성을 추측할 수 있게 적나라하다. 느낌은 오는데 그렇다고 얼굴이 보이지는 않는, 문학적 그림 같은 것이다. 영국 사상가 로버트 오언의 얼굴을 두고는 이렇게 썼다.


‘고집스럽고 자존심이 강한 영국인의 코를 가졌지만, 뺨 둘레까지 곧장 뻗어 나온 듯 보이는 움푹 팬 순진한 타원형의 두 눈과 달걀 모양의 갸름한 얼굴이 생각에 잠긴 온순한 큰 산토끼 같은 모습이다.'

사람의 얼굴을 말할 때 얼굴의 바깥(인상이나 느낌)을 말함으로써 얼굴을 묘사하는 것은 실루엣을 보여주면서 실체를 상상하게 하는 것과 비슷하다. 소설가 커트 보니것은 그의 마지막 에세이집 『나라 없는 사람』에서 '상상력의 회로가 설치돼 있는 사람들은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 얼굴에서 이야기를 읽어낸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얼굴은 그냥 얼굴일 뿐'이라고 썼다. 당대를 대표하는 냉소적 지식인도 상상되는 삶의 표상으로서 얼굴의 의미와 보이지 않는 여백에 상상으로 이야기를 써내는(그려내는) 것에 대해 한 말씀 남겼다. 나 또한 사람들을 만나거나 사진 속 얼굴을 볼 때 경험으로 축적된 나름의 주관으로 그들의 삶을 짐작하기도 한다.


영국 화가 윌리엄 헨리 브룩이 그린 노년의 로버트 오언 <위키피디아>

영국 화가 윌리엄 헨리 브룩이 그린 노년의 로버트 오언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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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 바사니의 소설 『금테 안경』(문학동네)에서 화자는 의사 파티가티 선생의 안경 낀 모습이 '전교 1등처럼 보였다'고 했다. '전교 1등'은 개별적으로 연상할 수 있는 시각적 상징이거나 은유다. 각자의 기억 속 여러 전교 1등들과 결합한 어떤 인상을 떠올릴 것이다. 선명한 얼굴로 보이기도 할 것이고 분위기만 은연중에 떠오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능숙하게 글이나 말로 묘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언어적 묘사가 눈 앞에 펼쳐진 실제처럼 느껴지고 만져지는 듯 실감 나는 경우도 있다. 눈앞에 보는 듯한 묘사가 사람의 얼굴에 대한 것이라면, 코는 몇 센티 높이로 눈과 눈 사이 넓이는 몇 센티고 눈꼬리는 미간을 기준으로 몇도 올라갔고 하는 설명으로는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말의 그림이다. 소설가 김중혁의 단편 「보트가 가는 곳」(『가짜 팔로 하는 포옹』, 문학동네)에 한 여인의 얼굴을 '눈이 커서 무척 유순한 인상이었고, 입술 옆에 작은 점이 하나 있었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아지는 점이었지만, 막상 점을 달고 다니는 입장에서는 콤플렉스로 여길지도 모를 정도의 크기였다.'고 썼다. 생김새를 상세히 그려놓지는 않았지만, 글의 여백에 마음껏 내가 아는 얼굴과 상상하는 얼굴을 조합하고 그려볼 수 있게 배려했다. 배려를 염두에 두고 썼는지는 모르겠지만(사실 작가는 어떤 식으로든 독자들을 배려한다), 글이 사람의 외모를 말하는 방식의 가장 높은 수준은 공간에 점 하나를 두고도 상상의 화폭을 가득 채우는 일이다.

가을 화분에서 나뭇잎 하나 떨어졌다. 나뭇잎일 뿐이지만 어떤 얼굴의 바깥이 보였다. ⓒ허영한

가을 화분에서 나뭇잎 하나 떨어졌다. 나뭇잎일 뿐이지만 어떤 얼굴의 바깥이 보였다. ⓒ허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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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총체적 삶과 관계들이 모두 얼굴에 집약되어 어떤 것은 드러나고 어떤 것은 숨겨져서 천천히 드러난다. 그저 느낌이나 비유만으로도 얼굴이 그려지는 것은 외형의 바깥에 존재하는 무형의 느낌과 기운들을 인간의 경험과 안목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길을 가다 본 맨홀 뚜껑의 무늬에서도, 공중전화에서도, 구멍 난 나뭇잎에서도 우리는 사람의 얼굴을 본다. 길에서 만나는 모든 얼굴의 추상들을 반기고 재미있어한다. 인간의 거의 모든 경험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고 얼굴이야말로 사람의 첫 번째 상징이자 본질의 일부다.


사람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보는 사람의 경험이나 식견과 깊은 관계가 있는 행위다. 보이는 만큼 보는 것이다. 여기서 보인다는 것은 평생 쌓이고 다듬어진 시각 경험과 지각과 감수성의 눈을 통한 것이다. 얼굴은 객관적 존재이지만 시간처럼 대부분의 경우 주관적으로 보이고 역할 한다. 그것을 인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표정은 보여주는 사람에 의해 일시적으로 인위적으로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지만, 얼굴을 만드는 것은 평생에 걸쳐 하는 일이다. 드러나는 내 얼굴도 그렇고, 내 머리로 상상하는 타인의 얼굴도 그렇다. 얼굴의 바깥이 얼굴을 만든다.





허영한 기자 youngh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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