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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라이트]999인 우리와 1000이 된 마쓰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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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여행으로 성장과 치유 가리킨 故 마쓰모토
아이들의 올바른 성장 이끈 인생 길잡이 메텔
"영생 원하지 않아" 人 나약함 위대하게 부각

지난 13일 마쓰모토 레이지가 급성 심부전으로 별세했다. 1960년대 말~1970년대 중반 태어난 이들에게 각별한 만화가다. 영향을 받기 쉬운 어린 시절에 그의 만화를 기반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이 TV를 휩쓸다시피 해서다. 시발점은 1980년 MBC에서 방영한 '오로라 공주와 손오공'과 '날으는 전함 V호.' 원제는 'SF 서유기 스타징가'와 '우주전함 야마토'다. 정부에서 SF 만화영화 방영을 금지해 그해 8월 송출이 끊겼다. 1982년에는 '우주해적 캡틴 하록(하록 선장)', 이듬해에는 '신 다케토리 이야기 1000년 여왕'이 방영됐다. 1986년에는 '혹성로봇 단가도A'가 '날아라 스타에이스'라는 제목으로 방송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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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은하철도 999'는 1982년 1월부터 매주 일요일 아침에 방영됐다. 마쓰모토나 일본 작품이라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 애니메이션이 국내에 공식적으로 들어올 수 없던 시절이었다. 조치는 1990년대 중후반에야 해금됐다. MBC는 1996~1997년 '은하철도 999'를 재방영했다. 2003년에는 MTV, 2008년에는 EBS에서 송출했다. 1980년대 초반부터 거의 10년 주기로 새로운 세대에게 꾸준히 소개된 셈이다.

▲ 청춘에게만 보이는 동경의 대상

마쓰모토가 그린 대다수 작품의 배경은 우주다. '우주전함 야마토'에서 지구는 외계인의 침략으로 멸망할 위기에 처한다. 우주전함 야마토는 환경 복원 장치인 '코스모 클리너'를 받으려고 아스칸달이라는 별로 떠난다. '은하철도 999'에서 철이는 기계 몸을 얻기 위해 안드로메다행 기차에 탑승한다. '우주해적 캡틴 하록'에서 하록은 아나키스트 해적이다. 부패한 지구 정부에 반대해 해적선에 오른다.


각각의 작품들이 내포한 이야기와 주제는 당시로서 파격적이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일본 애니메이션은 '로봇 레슬링'이 주를 이뤘다. 특히 나가이 고가 그린 '강철 지그', '겟타로보', '그레이트 마징가', '마징가Z' 등이 큰 인기를 끌었다. 하나같이 정의를 구현하는 싸움에 초점이 맞춰졌다. 마쓰모토가 추구한 세계관은 사뭇 달랐다. 예컨대 '은하철도 999'에서 은하철도는 독자나 시청자가 직면하거나 직면할 수직 선로의 인생과 같았다. 마쓰모토는 절대로 자기를 버리지 않을 사람과 함께하는 기나긴 여행으로 성장과 치유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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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미래의 지구에 사는 소년 철이. 기계 백작에게 엄마를 잃은 직후 메텔이란 여인을 만난다. 메텔은 은하철도 999의 승차권을 건네고, 철이는 영생을 보장하는 기계 몸을 무료로 준다는 별로 향한다. 은하철도 999는 증기기관차 모양이지만 우주 최고의 기술이 집약된 기차다. 지구에서 출발해 여러 별을 지나 안드로메다은하의 종착역까지 달린다. 철이는 정차하는 별에서 매번 다양한 존재들을 만나 모험하고 성장한다. 희로애락의 순간에는 늘 메텔이 함께한다. 어려움을 이겨내도록 도와주지만 무언가를 숨기는 신비로운 동반자다.

메텔은 '은하철도 999' 극장판 1기 엔딩에서 자신을 "나는 청춘의 환영. 젊은이들에게만 보이는 시간 속을 여행하는 여자"라고 한다. 마쓰모토도 2017년 방한 기자회견에서 비슷한 뉘앙스로 설명했다. "은하철도 999는 미완성이다. 1000이 되면 어른이 된다는 의미다. '은하철도 999'의 어린 철이에게는 메텔이 보이지만, 1000이 된 사람에게는 메텔이 보이지 않는다."


그가 메텔을 처음 구상한 시기는 열여덟 살이던 1956년이다. 도쿄를 발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는데 저편에 앉은 여인 뒤로 별의 바다가 흘러가는 공상을 했다고 한다. 마쓰모토는 서른여덟 살이 돼서야 메텔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름은 어머니를 뜻하는 라틴어 '메타'의 변형이다. 최흡 스탁피디아 대표는 저서 '은하철도999 캔디캔디 유리가면 마징가Z 겟타 로보 먼나라 이웃나라 황금박쥐의 비밀'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의 여인은 한편으로서는 '수라'가 되어 싸울 때 싸우는 강한 여인이고, 또 한편으로는 어머니이고 연인의 역할을 하는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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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모토는 메텔을 든든한 조력자로 묘사한다. 철이가 처음 은하철도 999를 타고 떠날 때부터 암시한다. "젊은이가 일생에서 단 한 번 맞이하는 여행을 시작할 거야. 실패 따위는 생각하지 않아도 돼. 이제 잊을 수 없는 여행을 할 거야. 너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어." 열차가 출발하는 순간 어린 독자·시청자는 철이와 묘하게 일치된다. 그들도 제각각 꿈과 비전이 있으며, 올바른 성장을 이끌어줄 인생 길잡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른에게는 자신의 시간을 사라져 버린 유년기로 마냥 되짚어가는 새로운 여정이다. 잠시나마 청춘으로 되돌려 외면해온 사실을 일깨운다. "인생은 언제나 알 수 없고, 의심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위해

마쓰모토의 만화 스튜디오인 레이지사는 대가(大家)의 죽음을 "별의 바다로 여행을 떠났다"고 표현했다. "시간의 고리가 닿는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그는 항상 말했다. 우리도 그날을 고대한다"고 밝혔다. 영역의 폭과 골은 넓고 깊다. 마쓰모토는 자신의 만화들을 다양한 연결고리로 이어왔다. 이른바 '레이지버스(마쓰모토 레이지+유니버스)'다. 1980년대 초반부터 기존 만화 주인공들이 서로 만나는 과정이나 신비에 싸여있던 주인공들의 유년 시절을 조명했다.


대표작으로는 '니벨룽겐의 반지'와 '메텔 레전드'이 꼽힌다. 후자에는 '은하철도 999'에서 기계화된 악인으로 그려진 메텔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가련한 여인이던 1000년 여왕의 이미지가 사라진 이유를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고향별인 라메탈 성은 1000년 여왕이 떠나면서 인간이 살 수 없는 별이 된다. 1000년 여왕은 기계 몸을 선택하나 음모에 휘말려 모든 인격을 잊어버린다. 마지막으로 인간으로서 마음을 잊을 때 메텔과 퀸 에메랄다스를 은하철도 999에 태운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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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은 마쓰모토의 드넓은 세계관을 관통하는 키워드 가운데 하나다. '은하철도 999'에서도 기계 몸으로 상징화된다. 한정된 삶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숨겨진 욕망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런데 철이가 여행 중에 만나는 많은 사람은 끝나지 않는 삶을 회의한다. 아르테미스처럼 죽기 위해 고향을 찾는 존재도 있다. "이 별은 나의 어머니예요. 날 낳아주신 어머니죠. 내가 죽으면 이 별 위에 내려주세요. 난 여기 죽기 위해 돌아온 거니까…. 영원히 잠들기 위해 돌아온 거니까."


아르테미스는 천천히 땅속에 잠긴다. 은하철도 관리국은 그렇게 자식을 품은 별을 진동파를 발사해 파괴한다. 불시착한 은하철도 999의 발목을 잡고 있어서다. 별은 은하철도 999와 철이를 위해 스스로 방어막을 해제하고 진동파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철이는 별의 희생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린다. 자기를 감싸다 죽어갔던 그 순간을. "사람과 사별하는 건 슬픈 일이군요…. 역시 기계 몸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손에 넣지 않으면 이 슬픔은 언제까지나 계속되겠군요, 메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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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는 기계 몸이 인간을 죽음의 고통에서 구원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생은 다른 이들의 수많은 죽음을 계속 마주하는 일이다. 은하철도 999는 그런 슬픔을 연료 삼아 기계 몸의 행성으로 향한다. 문학가 이명석과 칼럼니스트 박사는 저서 '은하철도 999, 너의 별에 데려다줄게'에서 역설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유한한 생명을 가진 모든 이들을 내 눈앞에서 떠나보내는 것을 감수하겠다는 결의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는 슬픔을 겪기 싫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싶다는 결심은 모순이다. 모든 사람이 다 영원히 살지 않는 이상에는, 아니면 영원히 사는 존재만 사랑해야 겨우 가능한 일이다."


마쓰모토도 생전 인터뷰에서 "나는 영생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영생을 산다면 대충대충 살 거다. 살아 있다는 것은 한정된 시간을 사는 것이다." 메텔이 상복을 연상케 하는 검은색 옷을 고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원을 달리는 그는 많은 젊은이를 죽음으로 이끌고 목도했다. 앞으로도 많은 죽음을 만날 것이기에 매 순간 명복을 빈다. 철이에게도 다르지 않았다. "철아, 네가 기계 몸을 얻으면, 기계 몸이 된다면…. 잠을 잘 필요도 없어져. 잠자는 즐거움도, 꿈꾸는 즐거움도 없어지지. 그리고 그렇게 영원히 살아가는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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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이가 나약한 인간을 버리고 기계 몸을 얻으러 가는 여정은 결국 인간이 가진 나약함을 위대하게 부각하는 순간들의 모음이다. 제각각 열차를 타고 닿았다 머물다 떠나기를 반복하는 우리에게 또 다른 메텔이 돼준다. 달려도 달리는 것 같지 않은 막막한 우주 공간에서 희망의 길을 안내한다. 그 종착역에서 마쓰모토는 메텔처럼 인사를 건넬지도 모른다. "안녕, 철아. 내가 네 청춘의 여행길에 함께 있었다는 걸 영원히 잊지 않을게. 난 청춘의 유령, 철이의 추억에 메텔의 이름으로 남았다는 것으로 충분해."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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