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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243명의 ‘김지영들’ 늦깎이 고교 졸업…“꿈 이뤄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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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차별로 제때 학교 못간 일성여고 학생들 졸업식
"학교에 감사…고교 시절이 인생 가장 큰 행복"

[아시아경제 최태원 기자] 23일 오전 9시께 서울 마포구 마포아트센터.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할머니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날 졸업식을 앞둔 ‘일성여자고등학교’ 졸업생들. 여느 고교 졸업생들과 마찬가지로 기념사진을 촬영하며 환하게 웃지만 대부분 60대 이상 만학도들이다. 이들은 연신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서로의 옷맵시를 칭찬하고, 그간의 추억들을 회상하며 들뜬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다소 엄숙한 분위기 속의 본식 예행 연습 중에도 몇몇 학생이 실수하자 꺄르르 웃으며 놀리기까지 하는 모습의 이들에게 나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23일 오전 9시께 서울 마포구 마포아트센터. 일성여고 졸업생들이 함께 모여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사진= 최태원 기자 skking@

23일 오전 9시께 서울 마포구 마포아트센터. 일성여고 졸업생들이 함께 모여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사진= 최태원 기자 sk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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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명의 ‘김지영’들이 이날 평생을 학수고대하던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아들었다. 김지영은 어릴 적부터 여성이기에 본 피해와 불이익을 다룬 소설 '82년생 김지영' 속 주인공 이름이다. 이들이 졸업한 일성여고는 ‘가난하거나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배움의 때를 놓친 여성들의 못다 이룬 꿈을 돕기 위해’ 설립된 2년제 학력인정 평생학교다. 특히 올해는 졸업생 243명 전원이 대학에 합격하는 쾌거를 이뤘다.

졸업생들은 가난과 여자라는 이유로 어릴 적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이제라도 꿈을 이뤄 행복하다고 입을 모았다.


초교 과정부터 만 8년을 경기도 평택에서 왕복 5시간 거리를 통학했다는 전영순씨(69)는 “마을버스와 전철, 시내버스 등 총 4번을 갈아타는 통학길을 8년을 다녔다. 그래도 어려서 못 배운 한을 푸는 길이라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평생 아버지와 남동생 둘의 뒷바라지를 했다”며 “10살부터 어머니 역할을 하면서, 매년 12번의 제사 준비도 혼자 도맡아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배울 수 있어 감사했다”고 속마음을 내비쳤다.


총학생회장 김건자씨(64)도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일성여고에 감사하다”며 “늘 학력으로 위축돼있던 마음에 당당함과 자신감이 생겼다. 고등학교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큰 행복이었다”고 밝혔다.

초교과정부터 만 8년을 경기도 평택에서 서울 마포구까지 왕복 5시간 거리를 통학한 전영순씨(69)가 23일 오전 10시에 열린 일성여고 졸업식에 참석해 내빈 축사를 듣고있다./사진= 최태원 기자 skking@

초교과정부터 만 8년을 경기도 평택에서 서울 마포구까지 왕복 5시간 거리를 통학한 전영순씨(69)가 23일 오전 10시에 열린 일성여고 졸업식에 참석해 내빈 축사를 듣고있다./사진= 최태원 기자 sk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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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을 이어가다 뜻밖의 인연을 만난 졸업생도 있었다. 어릴 적 학교 대신 공장으로 출근하며 중학교 다니는 오빠 학비를 댔다는 졸업생 한명숙씨(65)는 “학업이라는 보석을 캐다가 막내 사위까지 딸려왔다. 딸이 동문의 아들과 결혼을 앞두고 있다”며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그 말이 정말 맞는 것 같다”고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졸업생들은 졸업 이후에도 꿈을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겠다는 결의를 보이기도 했다. 명지전문대 사회서비스 상담복지과 진학을 앞두고 있다는 한씨는 “이제 대학 진학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하려 한다. 대학 졸업 후 꼭 사회에 빛과 소금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명지대학교 사회복지과에 합격한 김금봉씨(69)도 “늦은 나이지만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면서 “대학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맞춤형으로 도움을 주는 사회복지사가 되겠다”고 전했다.


이들의 졸업과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기 위한 이들의 발걸음도 줄을 이었다. 이 학교 3학년 1반 담임인 강래경 교사(40)는 “아쉽기도 하지만 모두 대견하고 잘됐으면 좋겠다”며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여러분들의 꿈을 항상 응원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의 졸업을 축하하러 왔다는 권석환씨(33)는 “평소 컴퓨터 과목 등은 집에서 과외도 해드렸었다. 졸업하시느라 고생 너무 많으셨고 축하드리는 마음이다”면서 “앞으로 꿈을 이루고, 하고 싶은 일을 하시며 살아가셨으면 좋겠다”고 응원했다.


졸업식을 찾은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축사를 통해 “저희 어머니도 무학이셨지만 한글을 독학해 어린 저에게 가르쳐 주셨다. 그런 어머니가 생각나는 날”이라며 “배움에는 때가 있다라는 말은 이제 안 통한다. 졸업으로 그치지 말고 더 높은 꿈을 향해 도전하시길 바란다”고 격려했다.





최태원 기자 skki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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