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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풍자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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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 브레히트의 희곡 ‘부상당한 소크라테스’는 무척 재미있는 풍자물이다. 이 작품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존을 위해 독배를 들던 모습은 간데없고, 전쟁터에서 도망가려고 잔꾀만 부리는 비루한 철학자로 묘사된다. 적군이 오자 소크라테스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다가 선인장 가시에 발을 찔린다. 놀란 그는 적군을 향해 얼떨결에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그 얘기를 잘못 전해 들은 아테네 시민들은 소크라테스가 적군에 맞서 호통을 쳤다며 영웅적인 행동을 칭송한다. 소크라테스는 차마 사실을 고백하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알키비아데스와 크산티페 앞에서 자신의 비겁한 행동을 실토한다. 브레히트에게 중요한 것은 영웅적 철학자의 모습으로 꾸미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이데올로기에 이용당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도주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는 일이었다. 이런 풍자는 사실적이기에 인간적이다.


[논단]풍자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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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은 ‘고사리를 캔 이야기’에서 절개와 지조의 인물 백이와 숙제를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만들어 버린다. 주나라 왕 아래에서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 두 사람이지만, 애당초 굶어 죽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고사리가 많이 나는 곳을 악착같이 찾아간 것이 수양산이다. 주나라의 곡식은 먹지 않겠다며 산으로 들어간 형제였지만 고사리를 찾아 거처를 옮겨 다닌다. 사슴까지 잡아먹으려는 형제의 모습은 절개를 지키려다가 굶어 죽었다는 전설과는 거리가 멀다. 루쉰의 풍자는 전설 속의 영웅을 현실 속의 평범한 인물로 끌어내린다. 루쉰에게 풍자는 전설의 포장까지도 벗겨내는 사실의 기록이었다.

그런데 이런 것도 풍자일 수 있을까 싶었다. 서울 민족 예술단체 총연합 등이 주최하고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의 강경파 의원 12인이 공동주관한 전시회 얘기다. 기사에 실린 사진들을 보니 윤석열 대통령이 어의(御衣)를 나체로 입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쓰러져 있는 윤 대통령 위에 김건희 여사로 보이는 여성이 앉아 있는 그림도 있다. 윤 대통령이 나체로 김 여사와 함께 칼을 휘두르는 모습이 담긴 그림도 눈에 띈다. 가짜뉴스로 판명 난 ‘청담동 술자리’를 다룬 그림도 있는데, 윤 대통령은 마이크를 잡고 한동훈 장관으로 보이는 인물은 탬버린을 들고 있다. 마리오네트 인형으로 표현된 윤 대통령 그림에서는 복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고, 무릎에는 욱일기 문양이 들어간 매듭이 묶여 있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안경을 쓴 개로 그려져 있다.


논란이 되자 국회사무처는 전시회를 공동 주관한 무소속 민형배 의원실에 ‘시정요구’ 공문을 보냈지만 불응했고, 결국 그림들은 강제로 철거됐다. 철거를 지시한 이광재 국회 사무총장은 알다시피 민주당 출신의 정치인이다. 그런데도 전시회를 하려 했던 정치인들은 "국회사무처는 풍자로 권력을 비판하겠다는 예술인의 의지를 강제로 꺾었다"고 항의했다.


이들이 전시하려 했던 그림은 풍자가 아니다. 브레히트나 루쉰의 풍자에서 접할 수 있는 깊이도, 공감도 없다. 오직 증오와 혐오의 감정만이 가득 차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루쉰이 풍자에서 그렇게도 강조했던 ‘사실’이 없다. 19세기 사실주의 화가 구스타프 쿠르베는 천사를 그려달라는 교회의 주문에 이렇게 답했다.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시오. 그러면 천사를 그려주겠소." 쿠르베는 사상이나 관념에 따라 그림을 그리지 않고, 자신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느낀 것만을 그렸다. 그러나 오직 정치적 신념으로 사실을 왜곡하며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그들은 무엇으로 그리는가. 가짜가 진짜를 참칭하는 시절이다.


유창선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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