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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K-우먼]"혈연 아니지만 우리는 연결…'가족' 될 때 못 해낼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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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에 미국 이민…차별·혐오 문제의식 습득
단편 '조국'으로 주목…30년 걸쳐 '파친코' 완성
'어메리칸 학원' 집필중 "모든 독자 한국인 됐으면"

[파워K-우먼]"혈연 아니지만 우리는 연결…'가족' 될 때 못 해낼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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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서믿음 기자] ‘we are powerful family(우리는 강력한 가족).’ 이민진 작가가 책에 서명할 때 늘 적는 말이다. 그 속엔 "비록 혈연은 아니지만 우리는 연결돼 있다. ‘내’가 아니라 ‘우리’가 될 때 못 해낼 게 없다"는 지론이 담겨있다. 그만큼 이해에 기반한 ‘연대’를 강조한다. 그런 이유에서 그의 소설에는 ‘계급’, ‘차별’, ‘혐오’가 주요 테마를 이룬다.


이런 테마는 어린 시절 이국에서 겪은 경험이 영향을 미쳤다.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난 작가는 일곱 살에 부모님을 따라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쥐가 나오는 방 한 칸짜리 아파트에서 다섯 식구가 살았던’ 힘겨운 시절에 동양인을 향한 인종차별을 견뎌내야 했다. 계급, 차별, 혐오 문제의식은 자연스럽게 습득됐다.

문제의식을 글쓰기에 투영하기 시작한 건 열아홉 살 대학 시절이다. 학교 수업을 땡땡이치고 들은 선교사 특강이 계기가 됐다. 왕따를 당하던 한국계 일본인 아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백인 선교사의 간증은 그의 가슴에 큰 균열을 일으켰다. 죽은 아이의 졸업 앨범에 친구들이 적은 "네가 온 곳으로 돌아가라", "김치 냄새가 난다", "죽어죽어죽어"란 말은 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됐다. 소설 ‘파친코’는 그렇게 발아했다.


하지만 바로 작가를 꿈꾼 건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글쓰기에 소질이 있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지만, 여성이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된다는 말이 엉뚱하게 여겨지던 시절의 분위기는 그를 위축시켰다. 결국 법조인의 길을 걸었다. 1992년 조지타운대 로스쿨을 졸업한 그는 기업변호사로 일하며 이민 사회의 성공모델로 성장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시절은 그리 길지 못했다. 간 질환으로 건강이 악화돼 일을 지속할 수 없었다. 그는 "누군가가 뒤에서 쫓아오는 것처럼 바쁘게 살았는데, 간암에 걸릴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다르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그렇게 법조계를 떠난 1996년 필연적으로 펜을 잡았다. 일본에서 살아가는 조선인들의 삶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끈질기게 연구하고 조사했다. ‘거북이’란 별명처럼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글을 써나가, 2002년 단편소설 ‘조국’을 펴냈다. 파친코에 영감을 준 소설로, 페덴 상을 받았다. 그는 당시 받았던 인정이 이후 30여년에 걸쳐 파친코를 써 내려가는 데 큰 힘이 됐다고 증언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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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집필에 속도가 붙은 건 2007년 일본에 머물면서다. 일본계 미국인인 남편이 도쿄로 발령 나면서 ‘자이니치’라 불리는 일본에 사는 조선인들의 삶을 직접 보고, 들었다. 그 경험으로 이민진 작가는 써두었던 원고를 대대적으로 수정했다. 그는 "일본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복잡하고도 광활한 인생사에 겸허해져서 옛 원고를 버리고 2008년에 다시 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30년에 걸쳐 쓰고 또 쓰고 수정했다"고 술회했다. 개작 과정을 거치면서 "너무 재미가 없어 남편조차 지루해서 못 읽겠다"고 했던 초고가 대폭 수정됐다. 이때 본래 주인공이었지만 너무 착하고 삶이 편했던 탓에 대서사에 어울리지 않았던 솔로몬이 주변인으로 밀려나고, 초고에 없던 주인공 선자가 탄생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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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세상의 빛을 본 파친코의 파장은 세계적으로 넓게 일었다. 무능한 국가 탓에 타국에서 유리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인의 삶을 깊이 있게 조명하면서 현시대의 ‘디아스포라’ 아픔을 부각했다. 그렇다고 디아스포라로 흩어진 이들을 마냥 피해자로만 묘사하지는 않는데, 이는 "역사가 우리를 망쳐놓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파친코의 첫 문장과 맥을 같이 한다. 이민진 작가는 자신의 소설 첫 문장이 해당 소설 전체를 드러내는 ‘주제문’이라 밝혔다. 파친코에 앞서 디아스포라 3부작의 첫 작품으로 꼽히는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음식’의 첫 문장은 "능력은 저주일 수 있다"이다. 재능 넘치고 좋은 교육까지 받았으나 성공의 문턱에서 미끄러지는 이민 2세대가 겪는 세대 간, 계층 간, 남녀 간 갈등을 사실적으로 묘파했다.


디아스포라 3부작의 마지막 편은 한국의 교육열에 관한 이야기다. 제목은 ‘어메리칸 학원’. 현재 작가가 미국 뉴욕에 거주하며 심혈을 기울여 집필 중이다. 집필에 임할 때면 관련자 수백명을 인터뷰하고 분석할 정도로 열성적인 성미 탓에 다소 시간은 걸리겠지만, 작품을 통해 세계인에게 한국의 ‘학원’을 설명할 예정이다. 그는 "세계 곳곳에 알려진 한국인에 대한 지식은 일부분일 뿐"이라며 "학원을 이해하지 않고는 한국인을 이해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일본어 ‘파친코’를 영어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PACHINKO’라고 제목에 명시했듯이, ‘학원’도 아카데미 등으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소개할 예정이다. 비 올 때 입는 ‘버버리’가 영국 브랜드 버버리에서 유래했듯이 외국인도 한국적 개념 이해를 위해 한국어를 그대로 차용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민진 작가는 ‘온전한 의미 전달’을 몹시 중시한다. 번역에 유난히 공을 들이는 것도 그 때문. 지난 7월에는 파친코 품절 대란을 겪으면서까지 출판사를 바꿔 새 번역을 내놓았다. 그는 번역을 ‘문학의 천사와 예술가의 작업’이라 지칭하며 "표현 하나하나가 너무나 중요하다. 고심해서 쓴 표현이 번역되면서 기존 스토리텔링을 그대로 가져가는 게 중요하다. 작품을 쓴다는 건 저항적이고 혁명적인 위험한 일인데 그걸 이해해줄 출판사가 필요했다"며 인플루엔셜을 새로운 파트너로 낙점한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제 책을 읽는 독자 모두가 한국인이 됐으면 좋겠다." 지난 8월 파친코 개정판 출간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전한 이민진 작가의 말이다. 좋은 문학작품이 독자를 작품 속 시대로 끌어들이듯, 한국인이 겪은 이야기가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져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게 이해를 전제했을 때 비로소 ‘우리’로서 하나 될 수 있다고 그는 강조한다.


이민진 작가는 작품의 국내 호응에 그간 보냈던 러브레터에 이제야 답장을 받는 기분이라고 말한다. 그는 "출간 초기 비아시아인들만 읽어 걱정했지만 이제는 많은 분이 좋아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책을 읽은 후에 ‘이제야 엄마가 이해가 간다’, ‘이제야 아빠와 얘기를 할 수 있게 됐다’는 반응을 들으면 아주 보람차고 감사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가 (작품을 통해) 가족으로 연결됐을 때 못 할 일이 없다"고 강조한다. 가족이 된, 가족이 될 세계인의 시선이 한국인을 향하고 있다.


▶이민진 작가는 누구

세계적으로 뜨거운 관심과 사랑을 받는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다. 경계인으로서의 날카로운 시선과 공감을 바탕으로 한 통찰력으로 복잡다단한 역사와 인간의 본질을 포착하면서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랐다.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난 작가는 일곱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예일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후 조지타운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로 일했으나, 건강 문제로 그만두게 되면서 오랜 꿈이었던 글쓰기를 시작했다. 2004년부터 단편소설들을 발표하며 주목받기 시작했고, 2007년 미국 이민자의 이야기를 담은 첫 장편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을 통해 작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2017년 출간한 두 번째 장편소설 ‘파친코’는 출간 당해 뉴욕타임스, BBC 등 75개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고, 현재 33개국에 번역 출간됐다. 올해 뉴욕주 작가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으며, 한국에서 만해문예대상과 디아스포라 문학상을 받았다. 현재 뉴욕에 거주하며 ‘한국인 디아스포라 3부작’의 완결작이 될 세 번째 장편소설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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