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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와 사람] 사람살이를 이어주는 길 위의 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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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회색빛 도시에서도 사람을 살 수 있게 하는 나무들

도로 변에 우뚝 서서 지나는 사람들의 쉼터가 된 느티나무. 서울 중계본동. 사진 = 고규홍 작가

도로 변에 우뚝 서서 지나는 사람들의 쉼터가 된 느티나무. 서울 중계본동. 사진 = 고규홍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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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이겨내기 힘들 만큼 혹심하게 이어지는 여름 날씨에 몸도 마음도 지치게 하는 즈음이다. 어쩌는 수 없이 길을 나설 때면 햇살은 뜨겁고 살갗에 닿는 습한 바람은 피할 도리가 없다. 그나마 길가에 나무라도 없으면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등 바뀌기 기다리는 짧은 시간조차도 힘겨울 계절이 이 즈음이다. 횡단보도 곁에 파라솔로 인공 그늘을 만들어 놓은 곳이 있어 햇볕을 피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그 청량감은 나무 그늘을 따를 수 없다. 가로수가 짓는 나무 그늘은 여느 조형물이 지어내는 그늘과 다르다. 가로수들이 더 없이 고맙게 느껴질 수밖에.


얼마 전 어느 방송의 뉴스에서 공개적으로 진행했던 흥미로운 실험이 있었다. 서울 종로의 그늘 하나 없는 도로 한복판에서 진행한 실험이었다. 젊은 여성이 실험참가자였다. 실험 시작 전에 이 사람의 얼굴 온도는 35도였다. 그를 가로수도 없는 뙤약볕에 10분 동안 서 있게 한 뒤 얼굴 온도를 측정하니 36.6도로 1.6도가 올라갔다. 이어서, 같은 사람을 도로변 가로수 그늘로 옮겨 10분 정도 서 있게 하니, 36.6도였던 얼굴 온도는 34.8도로 낮아졌다. 1.8도 낮아진 것이다. 그게 끝이 아니다.

더 놀라운 건 다음 단계의 실험이었다. 다시 자리를 옮겨 실험을 이어갔다. 높은 키의 가로수가 무성하고, 그 아래 쪽 바닥에는 화단이라고 할 수 있는 낮은키의 나무들이 함께 있는 그늘이 다음 실험 장소였다. 굳이 말을 붙이자면 ‘하층숲’이 존재하는 자리다. 이 자리에 같은 사람을 10분 동안 서 있게 한 뒤 얼굴 온도를 재보니, 31.6도로 낮아졌다. 무려 5도나 떨어진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햇볕도 문제였지만, 햇볕이 땅에 닿은 뒤에 다시 올라오는 복사열을 하층숲이 막아준 것이다. 5도 정도의 얼굴 온도라면 실제로 느끼는 온도 차이는 더 클 것이다. 이 정도라면 가로수의 효과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도로 중앙의 교통섬에 서서 오가는 자동차의 매연을 흠뻑 뒤집어 쓴 채 살아가는 오래 된 느티나무. 서울 시흥동. 사진 = 고규홍 작가

도로 중앙의 교통섬에 서서 오가는 자동차의 매연을 흠뻑 뒤집어 쓴 채 살아가는 오래 된 느티나무. 서울 시흥동. 사진 = 고규홍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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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햇볕을 가려주는 그늘도 효과가 크지만, 그 못지않은 큰 이유가 있다. 바로 살아있는 나무라면 당연히 쉼 없이 진행하는 증산작용의 효과가 있다. 나무는 뿌리로부터 물을 끌어올려 잎에서 광합성을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나뭇잎으로는 끊임없이 수분을 증기 형태로 날려 보내게 되는데 이를 ‘증산작용’이라고 한다. 나무 그늘에서 단순한 햇볕 차단 효과 이상의 삽상함을 느끼게 되는 건 그래서다. 증산작용의 효과는 나무가 울창한 숲에 들어설 때 누구나 경험했을 결과다. 그늘 효과에 증산작용의 효과가 덧붙여진 것이다.


곰곰 돌아보면 도시에 나무가 필요한 건 단순히 이 계절의 일만은 아니다. 미세먼지와 황사로 뿌옇게 흐린 날씨가 이어지는 때에도 사람들은 나무를 떠올린다. 미세먼지를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이 거론되기는 하지만, 나무만큼 미세먼지를 지속적이고 효과적으로 흡수하는 건 없다.


나무가 미세먼지와 매연을 빨아들이는 원리는 단순하다. 식물도 사람처럼 숨을 쉰다. 나무는 잎 표면에 ‘기공’이라고 부르는 미세한 숨구멍을 통해 쉼없이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뿜는다. 나무는 태양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한낮에는 탄소를 빨아들여 광합성을 하고 산소를 배출하며 밤에는 그 반대로 여느 동물처럼 산소를 흡수하고 탄소를 내뿜는다. 이 작용은 하루 종일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도시의 미세먼지와 매연은 나뭇잎의 기공으로 들락이는 공기를 따라 빨려들어가 들러붙게 된다. 결국 기공이 많은 나무가 더 많은 미세먼지를 빨아들이게 된다.

한적한 마을길 가장자리에 서서 지나는 사람들의 쉼터가 된 왕버들. 청주 서촌동. 사진 = 고규홍 작가

한적한 마을길 가장자리에 서서 지나는 사람들의 쉼터가 된 왕버들. 청주 서촌동. 사진 = 고규홍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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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미세먼지를 빨아들이려면 미세한 기공이 많은 나무가 효과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잎의 표면적이 넓은 나무를 도시의 가로수로 심게 됐다. 흔히 ‘플라타너스’라고 더 많이 부르는 양버즘나무가 그 대표적인 경우다. 벚나무 이팝나무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도 아닌데다, 줄기 껍질이 마치 버짐 핀 얼굴처럼 얼룩진 바람에 그다지 아름다운 나무로 여기지 않으면서도 굳이 양버즘나무를 가로수로 많이 심는 데에는 뚜렷한 까닭이 있다.

양버즘나무의 넓은 잎에는 당연히 기공이 여느 나무에 비해 많은데다, 잎의 표면에는 얼핏 보아서 구별할 수 없는 매우 작고 가는 솜털이 촘촘히 돋아 있다. 이 작은 솜털은 미세먼지와 공해 매연을 흡착시키는 데에 발군이다. 그러니까 나무가 숨을 들이쉴 때 미세먼지를 빨아들였다가 숨을 내뱉을 때, 빨아들였던 미세먼지를 도로 내보내면 제로섬게임이 되겠지만, 양버즘나무의 미세한 솜털은 한번 빨아들인 미세먼지를 오래도록 흡착한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매연과 공해로 뒤덮인 도시 환경에서도 잘 버틸 생명력이 강한 나무이기도 하다. 도시의 나쁜 공기를 빨아들여 정화시키는 가로수로 더 좋은 나무가 있을 수 없다. 세계 곳곳에서 가로수로 널리 심어 키우는 나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심지어 공해 걱정이 그리 크지 않았을 기원전 오 세기 무렵의 그리스에서도 가로수로 양버즘나무 종류를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정도다.


얼마 전 발표된 산림과학원의 연구 결과 가운데에 ‘도시 가로수로 적합한 수종’을 골라낸 게 있다. 이 연구에서는 양버즘나무보다 ‘화백’이라는 나무의 미세먼지 흡수 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화백의 잎은 가느다랗지만 그 표면에 미세한 주름이 굉장히 많이 이어져 있는데, 이 주름을 펼치면 앞에서 이야기한 양버즘나무의 잎보다 넓은 면적이 되고, 당연히 그 표면에는 기공이 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양버즘나무는 가을에 낙엽을 하고 나면, 이듬해 봄까지는 잎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공기 정화 능력을 멈추게 되지만, 화백은 상록성 나무여서 겨울에도 끊임없이 미세먼지를 흡수하니, 한햇동안의 미세먼지 흡수량이 더 높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도로 변의 버스 정류장에 우뚝 선 느릅나무 노거수. 단양 향산리. 사진 = 고규홍 작가

도로 변의 버스 정류장에 우뚝 선 느릅나무 노거수. 단양 향산리. 사진 = 고규홍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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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나무를 심는 까닭은 또 있다. 환경 정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도시 환경을 아름답게 한다는 이른바 ‘미화’ 효과다. 즉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벚나무 이팝나무는 다른 어떤 까닭보다 봄 한 철 동안 도시의 환경을 아름답게 한다는 이유로 심어 키운다. 뿐만 아니라 가을에 형광빛 노란 잎을 무수히 달고, 도시를 환하게 밝히는 은행나무 역시 도시 환경을 아름답게 하려는 이유로 심어 키우는 나무다.


도시의 나무들은 도시인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정화하기 위해 가장 더러운 환경에 자신을 내놓고 살아가도록 도시인들이 심어 키운다. 사람살이의 환경을 더 좋게 하려는 이유로 나무를 활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가로수를 필요로 할 때 못지않게 성가셔 할 때도 많다. 이를테면 도로변의 나무가 너무 크게 자라나면 교통 표지판을 가릴 뿐 아니라, 도로 위로 뻗은 가지가 부러질 위험도 있다. 사고를 줄이기 위해서는 베어내야 할 이유가 만들어진다. 도로 변의 상가에서는 애써 지은 간판을 가린다는 이유의 민원까지 이어진다. 실용적인 이유로 심은 나무이니, 역시 실용적인 이유로 베어내야 할 이유의 정당성을 찾는 것이다.


심지어 나무의 본성을 억압하는 일도 항다반사다. 지난 봄, 어느 지차체에서는 은행나무 열매의 냄새를 방지하기 위해 새로 올라오는 꽃눈을 제거한다는 소식이 있었다. 은행나무의 생식 본능을 억제 혹은 말살하겠다는 잔인한 조치다. 《주역》에는 ‘대대待對’라는 개념이 있다. 음양의 조화를 짚어가는 《주역》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생명 개념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상대를 마주 바라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암수가 따로 있는 은행나무로서 암나무와 수나무가 서로를 기다리고 마주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건 《주역》의 이치에 들어맞는 생명 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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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도시의 은행나무는 사람들에 의해 그의 생명 원리가 박탈되어가는 중이다. 은행 열매의 고약한 냄새를 떠올릴 때만큼은 무더위를 식혀주는 나무 그늘이나 미세먼지 흡착 효과, 노란 단풍의 미학적 즐거움은 젖혀놓는다. 은행나무가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시간과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시간을 비교하는 건 어리석은 계산이 되고 만다. 고작 열흘 남짓이면 충분히 보낼 수 있는 가을의 냄새가 성가셔서 생명체로서 은행나무의 본능을 짓밟는 고약한 짓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무를 온전히 이용하려면, 생명체로서 그를 잘 지켜야 한다. 나무가 오래도록 우리 사는 세상을 더 살 만한 곳으로 이뤄주게 하도록 하는 바탕은 그의 본능을 지켜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무와 더불어 살아가는 바른 길이다.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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