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모금] '유감이지만…일본 콜센터의 한국인
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 편집자주
9회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이다. 일본 여행사의 콜센터 초보 상담원으로서 겪은 고충과 코로나19로 인한 혼란, 콜센터에서 사용하는 매뉴얼화된 존경어와 겸양어가 실망과 기대, 안도와 우울 같은 생생한 감정들과 대비되며 만들어 내는 묘한 울림을 전한다.
일본 회사의 불합격 메일은 일관된 형식을 띤다. 시작은 언제나 내어 준 시간에 대한 심심한 감사와 지원자의 역량에 대한 입바른 칭찬이다. 본론은 ‘대단히 유감이지만(誠に?念ではございますが)’이라는 말 뒤에 등장한다. 거듭 탈락 통보를 받다 보니, 나는 메일을 받으면 ‘유감’이라는 단어부터 훑는 경지에 도달했다. 이 단어가 포착되면 십중팔구 불합격이라는 뜻이다. 상냥함에서 비롯한 인사치레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유감이면 뽑아 주지.’라는 원망부터 생겼다.
(……)
콜센터에 입사하자 ‘대단히 유감이지만’이라는 문구를 습관처럼 쓰는 쪽은 오히려 나였다. 취업처럼 삶을 좌지우지하는 대단한 안건은 아니었다. 객실 층수를 미리 지정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고객에게 “대단히 유감이지만, 호텔에 문의하니 사전 지정은 어렵다고 합니다.”라고 안내하거나, 환불 불가 상품을 무료로 취소해 달라는 고객에게 “대단히 유감이지만, 예약 시 동의하신 규정에 따라 환불은 어렵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식이었다.(「합격 의자에 앉지 못한 내게」에서)
상담원의 입에서 나오는 “어쩔 수 없습니다.”는 대개 ‘안 된다’의 완곡한 표현이다. 여행을 잘 다녀와서 운전 기사의 태도가 기분 나빴으니 전액 환불해 달라는 고객에게, 객실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벽에 구멍을 뚫어 놓고 보상은 못 하겠다는 고객에게, 실수로 취소 버튼을 누른 뒤 홈페이지 오류라며 생떼를 쓰는 고객에게,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하고 운을 떼는 식이다. 듣기 좋은 포장을 한 겹 들어내면 결국 당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우리는 규정대로 처리하겠다는 선언이다. ‘부득이하게’라는 표현은 고객의 요구를 받아 줄 수 없거나 그럴 필요가 없을 때 주로 사용한다.
그런데 인사팀에서 발송한 전체 이메일에 이 ‘부득이하게’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직감이 들었다. 미사여구를 헤치고 다급히 확인한 본론은 이랬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영 악화로 부득이하게 인원 감축을 결정했습니다. 본인이 대상자인지 여부는 몇 시간 내에 발송해 드릴 이메일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어느 날 찾아온 정리 해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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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센터의 말 | 이예은 지음 | 민음사 | 200쪽 | 1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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