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의 한국유사] 경주 월지(月池)와 월성(月城)
당나라와 전쟁 계기 대대적 축성 작업
월지, 단순 조경 아닌 ‘동해’ 상징
신라 왕궁 위치한 월성, 남쪽에 자연하천 북쪽에 인공 해자
현재 발굴 중인 고대수로 ‘발천’ 주목
코로나 19 상황이 호전되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 관광지 경주도 북적이고 있다. 경주하면 불국사, 첨성대, 대릉원, 월성이 먼저 떠오른다. 경주의 야경으로는 ‘동궁(東宮)과 월지(月池)’를 빼놓을 수 없다. “2월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 ‘삼국사기’ 문무왕 14년(674)조에 보이는 월지(月池)의 축조 기사다. 예전에는 안압지(雁鴨池)라 불렀다. 월지가 축조된 674년은 신라와 당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두고 전쟁을 벌이던 나당전쟁 기간이다.
당은 674년 1월 유인궤를 계림도총관(?林道總管)으로 삼고 신라 원정군을 편성했다. 위위경(衛尉卿) 이필과 우령군대장군(右領軍大將軍) 이근행으로 하여금 유인궤를 보좌케 했다. 당의 대규모 침공이 예상되는 가운데 신라가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신라가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은 자신감의 표현이며, 당의 사정을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파악되고 있다. 하지만 ‘자치통감’ 상원원년(674)조에 따르면 9월 위위경 이필이 연회 중에 의문사를 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계림도행군의 부장(副將) 역할을 맡은 이필이 674년 가을까지도 수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를 통해 674년에는 당의 신라 침공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70년 본격화된 나당전쟁은 670년대 초반 당군의 한반도 남하와 신라군의 방어로 전개되었다. 672년 8월 당군은 평양 인근의 한시성과 마읍성을 함락시킨 후 백수성으로 남하했다. 이에 맞서 신라군과 고구려부흥군은 당군을 먼저 공격하여 승기를 잡았다. 하지만 신라군은 달아나는 당군을 석문(황해 서흥)까지 뒤쫓았다가 당군의 역습을 받아 크게 패하고 말았다. 석문 전투의 패배로 인해 신라는 나당전쟁에 대한 전략을 방어로 전환하게 되었다.
석문 전투 이후 신라는 전역에 10여 개의 성을 증축하거나 신축하여 방어를 강화했다. 672년 8월 주장성(경기 광주), 673년 2월 서형산성(경북 경주), 673년 8월 사열산성(충북 제천)을 쌓았다. 673년 9월에는 국원성(충북 충주), 북형산성(경북 경주), 소문성(경북 의성), 이산성(경북 고령), 주양성(강원 춘천), 주잠성(강원 고성), 만흥사산성(경남 거창), 골쟁현성(경남 양산)을 쌓았다. 대대적인 축성이 이루어지면서 신라의 주요 요충지와 수도 방어망이 강화되었다.
신라의 제1방어선은 당군과 경계를 이루던 임진강이었다. 임진강 후방에 주장성, 주양성, 주잠성이 축조되면서 제2방어선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다시 소백산맥 일대를 중심으로 국원성, 사열산성, 만흥사산성이 축조되면서 제3방어선이 강화되었다. 경상도 내륙에는 소문성, 이산성, 골쟁현성이 축조되면서 제4방어선을 형성하였다. 마지막으로 서형산성과 북형산성이 축조되면서 제5방어선이자 왕경방어선이 완비되었다. 이렇듯 신라는 5단계에 걸친 방어선을 편성하여 축차적으로 당군의 남하에 대비하였다.
신라는 672년부터 673년까지 대대적인 축성작업을 진행하였다. 수도 경주에 월지가 축조된 시점은 신라의 대대적 축성작업이 마무리되던 674년 2월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월지를 단순한 조경시설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월지는 그 자체가 동해(東海)를 상징하고, 월지 내에 조성된 세 개의 섬은 동해 중에 있는 삼신산(三神山)을 표현한 것이다. 백제 무왕 35년(634)에도 궁궐 남쪽에 연못을 파고 삼신산 중의 하나인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상징하는 섬을 만든 사례가 있다. 다시 말해 월지 조영은 용(龍) 신앙과 신선(神仙) 신앙이 반영된 호국적 사업이라 할 수 있다.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요동으로 이동한 676년 2월에 조성되기 시작한 부석사는 문무왕의 호국정신에 의해 창건된 호국사찰이다. 부석사 또한 용 신앙적 요소가 사찰 조영에 깊이 반영되어 있다. 월지와 부석사는 모두 당의 침략에 직면하고 있던 신라인들의 호국적인 염원이 담긴 조영물로 보아야 한다. 674년 2월 월지 조영은 큰 전쟁을 앞두고 있던 신라의 상황에서 일어난 자연스러운 결과라 할 수 있다.
호국 조영물인 월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 월성(月城)이다. 월성은 사적 제16호로 신라 왕궁이 위치했던 곳이다. 동서 길이는 890m이고, 남북 길이는 260m이며, 둘레는 2,340m에 달한다. 독립구릉에 위치하며 정상부는 넓고 평탄한 편이다. 월성의 남쪽에는 자연 하천인 남천(南川)이 흐르고, 월성의 북쪽에는 인공 해자(垓字)를 조영하여 방어를 강화했다.
월성의 성벽은 4세기 무렵을 전후하여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월성에는 성문이 14곳 만들어졌는데 남쪽 5곳, 서쪽 3곳, 동쪽 3곳, 북쪽 3곳이다. 이 가운데 남쪽, 서쪽, 동쪽의 성문이 먼저 활용되다가 7세기 문무왕대를 전후하여 북쪽 3곳이 새롭게 조성된 것으로 파악된다. 월성의 정문은 5~6세기까지 남쪽으로 향해 있었다. 하지만 7세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궁궐 범위의 변화 그리고 왕경의 발전과 더불어, 북쪽으로 정문이 새롭게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683년 신문왕은 일길찬 김흠운의 딸을 왕비로 정하고 왕궁의 북문에서 성대하게 맞이하였다. 또 734년 성덕왕은 백관에게 북문으로 들어와 상주하도록 하교한 바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월성의 정문은 북문일 가능성이 높다. 월성의 남쪽에는 남천(南川)이 흐르고 있어 남쪽으로 정문을 설치할 수 없다. 경주분지의 지형상으로 볼 때 도성 전체의 정문은 서문, 궁성(월성)의 정문은 북문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왕궁 역할을 했던 월성의 조영과 관련해 주목되는 유적은 월성 북쪽의 해자(垓字)다. 해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 외곽에 구덩이를 파고 물을 채워 놓은 연못이다. 월성 북쪽의 해자는 7세기까지 땅을 파고 물을 채운 수혈(竪穴) 해자였다가, 이후 돌로 시설물을 만들어 물을 가둔 석축(石築) 해자로 변천하였다. 월성 해자는 1984년 시굴 조사에서 처음 확인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2022년 3월 월성 해자는 3년여 만에 정비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
월지와 월성 해자는 모두 물을 매개로 조영되었으며, 위치상으로 볼 때 불가분의 관계다. 월지 조영에서 보면 그곳에 소용되는 물이 어디에서 흘러들어와서 어디로 흘러나가느냐는 주요한 관심 사안이다. 이와 관련하여 발천(撥川)의 존재가 주목된다. 현재 발천은 월성 인근의 고대 수로로서 발굴이 한창 진행중이다. 발천은 대체로 월지 부근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렀는데, 월성의 북쪽을 가로로 지나며 월성의 서쪽에 위치한 계림(桂林)을 지난 후 남쪽으로 꺾어 남천에 합류하였다. 월성의 북쪽 해자에서 볼 때 보다 북쪽에 또 다른 하천이 해자와 같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모양새다. 현재 월성과 첨성대 사이로 흐르는 하천이었던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혁거세가 즉위하던 날 사량리의 알영정(閼英井)에 계룡(鷄龍)이 나타나 왼쪽 갈비로부터 계집아이를 낳았는데, 자태와 얼굴은 매우 고왔으나 입술이 마치 닭의 부리와 같았다고 한다. 이에 ‘월성의 북천(北川)’으로 데려가 목욕을 시켰더니 부리가 떨어졌는데, 이 때문에 그 내를 발천(撥川)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발천은 월지와 황룡사 주변의 저습나 용천수에서 생겨난 다양한 물길을 끌어들이는 기능을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674년 월지가 조영되면서 발천 수로도 정비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천을 발굴하고 있는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의 조성윤 팀장은 “신라 왕궁의 영역이 발천까지 확장됨에 따라, 월성 북쪽의 해자는 궁내 연못처럼 성격이 변화된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나당전쟁을 거쳐 신라가 676년 삼국을 통일하면서 외부 위협이 감소됨에 따라 월성의 방어기능도 약화되었다. 또한 왕궁 자체가 북쪽으로 확장됨에 따라 월성의 북쪽 해자가 궁궐 내 조경 연못처럼 변모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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