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소설가 한강은 2013년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라는 제목의 시집을 출간했다. ‘마크 로스코와 나’라는 제목의 시 두 편을 실었다.


그는 1903년 9월25일에 태어나

1970년 2월25일에 죽었고

나는 1970년 11월27일에 태어나

아직 살아 있다

한강이 태어나기 약 9개월 전 죽은 로스코는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미국에서 활동한 추상 표현주의 화가다. 프랑스 문화 역사가 아니 코엔 솔라의 저서 ‘마크 로스코’에 따르면 1970년 2월25일은 로스코의 조수 올리버 스타인데커가 작업실에서 사망한 로스코를 발견한 날이다. 로스코는 스스로 손목을 그어 죽음을 선택했다.


로스코가 태어난 1903년은 제정 러시아(1721~1917) 말기였다. 로스코가 태어난 곳은 드빈스크. 드빈스크의 오늘날 이름은 다우가우필스다. 라트비아 제2의 도시다.

로스코가 태어나기 5개월 전인 1903년 4월19일 오늘날 몰도바 수도인 키시뇨프에서 포그롬이 발생했다. 포그롬은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인 약탈과 학살을 뜻하는 러시아어다. 부활절 연휴 사흘간 유대인 49명이 목숨을 잃었다.


제정 말기 러시아인들의 사회에 대한 불만은 유대인에게로 향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발트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텍사스주 만한 지역에서만 거주해야 했다. 당시 유대인 지정 거주지는 ‘페일(말뚝)’이라고 불렸다. 페일 지역에서 포그롬은 점차 확산됐다. 1905년 10월 오데사 포그롬 때에는 유대인 600명이 살해됐다.


로스코의 아버지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미국행을 택했다. 1912년 12월 아버지와 두 형이 먼저 미국으로 건너갔고 로스코는 이듬해 6월 엄마, 누나와 함께 드빈스크를 떠났다.


로스코를 주인공으로 하는 연극이 있다. 미국 극작가 존 로건이 극본을 썼으며 제목은 ‘레드’다. 극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로스코가 조수 켄과 함께 가로 2.8m, 세로 1.8m의 대형 캔버스를 선명한 붉은색으로 채우는 장면이다. 불현듯 스치는 영감에 흥분한 로스코는 조수에게 서둘러 안료를 가져오라 하고 둘은 빠르게 대형 캔버스를 채워나간다.


국내에 연극 레드를 소개한 공연기획사 신시컴퍼니에 따르면 두 배우가 자신보다 큰 캔버스를 붉은색으로 채우는 데 허락된 시간은 1분30초다. 두 배우의 빠르고 힘찬 손놀림에서 번져나오는 붉은색을 보며 관객은 숨죽이게 된다.


로스코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은 붉은색으로 가득차 있다. 마치 죽음을 암시라도 하듯.

마크 로스코 '무제', 1970년  [이미지 출처= 미국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홈페이지]

마크 로스코 '무제', 1970년 [이미지 출처= 미국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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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시 ‘마크 로스코와 나 2’는 로스코의 마지막 작품을 보고 느낀 감정을 옮긴 듯하다.


한 사람의 영혼을 갈라서

안을 보여준다면 이런 것이겠지

그래서

피 냄새가 나는 것이다

붓 대신 스펀지로 발라

영원히 번져가는 물감 속에서

고요히 붉은

영혼의 피 냄새


(중략)


스며오는 것

번져오는 것


로스코가 드빈스크를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아홉 살이었다. 그는 후에 친구인 화가 로버트 마더웰에게 "드빈스크풍 옷을 입은 유대인 아이가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채로 미국을 횡단하는 여행이 어떤 것인지 자네는 결코 모를 거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솔랄의 저서 마크 로스코의 부제는 ‘슬픔과 절망의 세상을 숭고한 추상으로 물들이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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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살을 피해 고향을 등져야 했던 아홉 살 소년 로스코의 애달픈 삶을 떠올리게 되는 요즘이다. 블라미디르 푸틴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킨 지 어느덧 69일째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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