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모금] 법조문에 이런 표현이 있다고?...‘민법의 비문’
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 편집자주
“법률은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공포한 날로부터 20일을 경과함으로써 효력을 발생한다.” - 대한민국 헌법 53조
국립국어원 공공언어지원단장을 지낸 언어학자 김세중 박사는 이를 비문(非文)으로 지적한다. ‘발생하다’는 목적어가 필요 없는 자동사이기 때문에 ‘효력을 발생한다’가 아니라 ‘효력이 발생한다’가 올바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잣대로 저자는 민법 1조부터 1118조까지의 문장을 샅샅이 조사해 200개가 넘는 비문을 발견했다. 저자는 “민법 속 한국어는 1940~1950년대의 것이고, 일본 민법을 많이 참고하다 보니 일본어의 단어와 조사를 무비판적으로 옮겼다”며 “법조문이 어렵고 쉽고를 떠나 문법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면 꼭 고쳐야 한다"고 지적한다. 책에는 그런 비문 사례와 올바른 표현법이 담겼다.
'실종자의 생존한 사실'이라고 했는데 이는 마치 동요 '고향의 봄'에 나오는 가사 '나의 살던 고향은'을 연상케 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로 시작되는 이 동요는 한국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익숙한 노래다. 그래서 '나의 살던 고향은'에 대해 너무 익숙한 나머지 의문을 느끼는 사람이 별로 없겠지만 '고향의 봄'이라는 노래를 벗어나면 '나의 살던 고향은'이라는 표현을 쓸 사람은 없다. '내가 살던 고향은'이라고 한다.
'위반하다'는 '사랑하다'처럼 목적어가 있어야 하는 동사다. 그리고 그 목적어에는 조사 '을/를'을 붙여서 쓴다. 그런데 민법 제5조제2항을 보면 '전항의 규정에 위반한 행위는'이라고 되어 있다.
'대리의 목적인 물건이나 권리의 성질을 변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라고 했는데 참으로 의아하다. '변하다'는 위에서 본 '모이다'처럼 목적어가 필요 없는 자동사이다. '변하다'는 '무엇이 다른 것이 되거나 혹은 다른 성질로 달라지다.'라는 뜻으로 '~게 변하다', '~으로 변하다'로는 쓰일지언정 '~을 변하다'로는 쓰이지 않는 말이다. '사람을 모이다'가 말이 안 되는 것만큼이나 '~을 변하다'는 말이 안 된다.
민법에는 '-되다'라고 해야 할 것을 '-하다'라고 한 사례가 대단히 많다. '조건이 성취된 때로부터'라고 해야 할 것을 '조건이 성취한 때로부터'라고 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는 마치 '조건이 갖추어진 때로부터'라고 해야 문법적이면서 자연스러운데 '조건이 갖춘 때로부터'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조건이 갖춘 때로부터'는 누가 보더라도 말이 안 되는 비문이다. '조건이 성취한 때로부터'는 '조건이 갖춘 때로부터'와 다를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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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의 비문 | 김세중 지음 | 두바퀴출판사 | 191쪽 |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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