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하나의 사건이 전혀 예상치 못한 변화를 주도하기도 하는데, 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사태가 그런 사례인 듯하다. 러시아의 군사행동으로 인해 엉뚱하게도 가상화폐, CBDC(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화폐)와 같은 디지털화폐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미국과 유럽 등이 러시아를 미국 주도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축출하자 급해진 러시아가 가상화폐를 자금조달수단으로 이용하면서 나타난 현상. 가상화폐는 민간이 발행한 디지털화폐로 중앙은행의 통제를 받지 않는 데다 블록체인 기반으로 정보의 익명성 보호도 가능해서 스위프트 같은 글로벌 결제시스템도 우회할 수 있다. 돈이 있어도 만기가 돌아온 부채를 못 갚고, 수출대금도 받을 수 없는 러시아로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셈이다.
여기에 관심을 더욱 증폭시킨 건 미국 바이든 대통령의 ‘가상화폐 연구’에 관한 행정명령이다. 그는 지난 9일 가상화폐의 혁신지원과 CBDC 연구를 촉구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가상화폐의 제도화와 미국 CBDC라 할 수 있는 디지털 달러 발행’도 속도가 붙을 거란 전망이 나오고 있는 이유다.
미국은 지금까지 CBDC 발행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는 되도록 자제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바이든 대통령이 디지털화폐 지원 및 연구를 지시한 이유는 뭘까. 첫째, 전문가들은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러시아와 중국이 디지털화폐를 활용한 국제결제망 구축에 속도가 낼 수 있다는 점을 꼽는다. 이번 전쟁이 어떤 결과로 끝나든 러시아의 스위프트 복귀는 어려울 것이다. 러시아는 중국, 인도 등과 새로운 국제결제시스템 구축에 나설 수 있고 여기에는 각국이 발행한 CBDC와 가상화폐가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중국은 ‘디지털 위안화’를 국제결제통화로 만들 수 있는 호기라 생각함직하다. 중국은 이미 국경 간 결제시스템(CIPS)을 갖고 있다. 중장기적으론 중국, 러시아, 인도 등의 디지털화폐를 활용한 국제시스템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찬스라고 볼 수 있다.
둘째, 가상화폐 파워에 대한 재인식도 ‘디지털화폐 행정명령’을 서두르게 한 요인이라 생각된다. 미국은 러시아를 스위프트에서 퇴출시키면 러시아은행의 디폴트 등 금융공황이 바로 발생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 예상은 빗나간 것 같다. 중국의 지원 가능성도 있지만 의외로 가상화폐를 활용한 자금조달이 활발하기 때문이다. 현재 러시아국민들은 1200만개 이상의 가상화폐 지갑이 활성화돼 있고, 수신잔액도 239억 달러(29조원)에 달한다고 한다. 셋째, 중장기적으론 영국, 독일 등 유럽에서도 디지털 기축통화 목소리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보면 차라리 디지털화폐 논의를 선점함으로써 디지털 국제결제망에서도 ‘디지털 달러패권’을 유지하겠다는 복안이 깔려 있다.
아무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가상화폐를 포함한 디지털화폐 환경에 일대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디지털통화 발행 경쟁이 시작되고 가상화폐의 문제점을 규제하고 혁신을 지원하는 제도화 논의가 본격화될 것으로 생각된다. 규제라 해도 금지가 아닌 한 다른 각도에서 보면 새로운 산업에 대한 보호장치로 해석할 수 있다. 불확실성이 사라진다는 점에선 가상화폐로선 적어도 호재인 셈이다. 향후 관전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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