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피우니츠키, 침공 사흘 전 '베이스볼5' 열려
국가스포츠위원회 야구 활성화 '특명의 장소'
러시아군의 포탄 공격…폐허 될 위기 빠져

사진 제공=올렉산드르 바이노흐라도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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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피우니츠키는 우크라이나 키로보흐라드주의 주도다. 시민 22만여 명이 살고 있다. 18세기 중엽에는 옐리사베트흐라드로 불렸다. 러시아 로마노프왕조 여제의 이름을 땄다. 러시아 혁명으로 소비에트연방이 탄생한 뒤인 1924년에는 지노비예프스크가 됐다. 이 도시에서 태어난 볼셰비키 혁명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의 이름을 붙였다. 1934년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측근 세르게이 키로프의 이름을 딴 키로보로 개명됐다. 키로프는 그해 암살됐고, 지노비예프는 공범 혐의로 체포돼 처형됐다. 악명 높은 스탈린 치하 ‘대숙청’의 시작이었다. 1939년엔 러시아 중부의 같은 지명과 구분하기 위해 키로보흐라드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지금의 크로피우니츠키는 2016년 다시 개명된 지역명이다. 이 도시 출신 극작가의 이름에서 따왔다. 2013년 유로마이단 혁명 뒤 우크라이나 정부는 탈공산화 정책에 따라 구소련 상징을 법률로 금지했다. 이에 따라 도시 스물두 곳과 마을 마흔네 곳이 새 이름을 얻었다. 다만 키로보흐라드주 명칭은 헌법에 명시돼 있어 변경될 수 없었다.

지역명의 변천사에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현대사가 응축돼 있다. 도시는 다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었다. 크로피우니츠키는 수도 키이우에서 남동쪽 방향으로 302㎞ 떨어져 있다. 키이우 동쪽은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전장’과 동의어다. 지난달 24일 러시아군이 블라미디르 푸틴의 개전 명령에 따라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이날 크로피우니츠키 시내에도 포탄이 떨어졌다.


사진 제공=올렉산드르 바이노흐라도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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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피우니츠키는 우크라이나 야구의 성지기도 하다. 포탄이 떨어지기 사흘 전인 지난달 21일 시내에서 야구 대회도 열렸다. 2018년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이 정식으로 채택한 5인제 경기인 ‘베이스볼5’ 선수권대회였다. WBSC가 야구 보급을 위해 고안한 경기로 정식 야구장보다 작은 규격의 필드에서 배트가 아닌 주먹으로 공을 치고 달리는 경기다.

과거 한국 어린이들이 즐겼던 ‘찜뿌’와 비슷하다. 남녀 혼성 경기도 가능하다. 베이스볼5 선수권대회에는 우크라이나 여섯 지역 열세 팀 남녀 선수 100여 명이 참가했다. 경기 진행을 도왔던 우크라이나 야구 기자 올렉산드르 바이노흐라도프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메시지로 "도시내 전기와 통신에 문제가 있다. 선수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축구다. 1991년 독립과 함께 창설된 우크라이나 프리미어리그는 유럽축구연맹(UEFA)에서 열두 번째로 강한 리그로 평가된다. 전쟁 발발과 함께 리그 일정은 전면 중단된 상태다. 축구 다음으로는 농구, 복싱, 아이스하키, 럭비 등이 우크라이나에서 사랑받는다. 우크라이나는 역대 동·하계 올림픽에서 금메달 서른여덟 개 포함 메달 148개를 딴 스포츠 강국이기도 하다. 하지만 야구는 마이너 스포츠다.


사진 제공=올렉산드르 바이노흐라도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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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피우니츠키가 우크라이나에서 비인기 종목인 야구의 중심이 된 데는 사연이 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1980년대 중반 야구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소련 체육 정책을 총괄하던 국가스포츠위원회는 이 결정에 맞춰 야구를 ‘부활’시키기로 했다. 이에 따라 1987년에 야구와 소프트볼, 러시아판 야구인 랍타를 관장하는 협회가 결성됐고 첫 전국대회가 열렸다.


야구는 이미 잊힌 경기였다. 소련에서 야구는 1930년대 대공황을 피해 이주한 미국인들에 의해 처음 소개됐다. 여섯 팀으로 구성된 리그도 생겼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께 적성국 스포츠라는 이유로 탄압받았다. 리그와 팀도 소멸한 지 오래였다. 국가스포츠위원회는 인센티브를 내걸었다. 소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들은 한국의 전국체전과 비슷한 지역 대항 종합 스포츠대회를 운영했다. 종목 별 성적에 승점을 매겨 우승을 가리는 방식이었다. 야구와 같은 신생 종목은 2배수 승점을 받았다.


당시 크로피우니츠키에는 야구가 국기인 쿠바에서 온 유학생 다수가 거주했다. 주당국은 항공사관학교에 근무하던 축구 골키퍼 출신인 유리 콜라코프스키에게 야구팀 창단을 명령했다. 그는 쿠바 유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우크라이나 최초의 야구팀을 창단했다. 이 팀이 우크라이나 청소년체전에서 우승하자 야구는 키로보흐라드주가 중점 육성하는 종목이 됐다. 시내의 국립체육대학과 국가대표 훈련시설이 야구 훈련과 보급에 기지 역할을 했다.


사진 제공=올렉산드르 바이노흐라도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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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피우니츠키를 중심으로 성장한 우크라이나 야구는 키이우와 중견 도시들로 퍼져 나갔다. 지금은 열 도시에 소재한 열네 클럽이 승강제가 적용되는 1, 2부로 나뉘어 전국리그에 참가한다. 지역 리그도 열 개가 운영된다. 정규시즌이 끝나면 컵 대회가 열린다. 올해 대회가 열릴지는 알 수 없다. 많은 야구선수가 군대에 소집되거나 자원해 군복을 입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분리를 아쉬워하는 러시아 야구인들이 있다고 한다. 소련 시절 야구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공화국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였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야구인들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공화국 병합을 비극으로 여긴다. 수도 심페로폴의 폰톤 클럽은 소련 시절 전국대회에 출전했던 강팀이다. 이 클럽은 아직 우크라이나 리그에 출전하고 있지만 연고지를 잃었다. 분리독립을 선언한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연고 클럽도 키이우로 옮겨왔다.


지난 22일 크로피우니츠키는 위기에 빠졌다. 러시아군의 공습으로 경보가 발동됐다. 바이노흐라도프 기자는 은신처에서 어렵게 우크라이나와 야구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야구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 우크라이나 야구는 프로가 아니다. 이 게임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야구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언제 전쟁이 끝날지 모른다. 전쟁이 끝나도 야구보다 더 지원이 필요한 분야가 많다"면서도 "우크라이나는 부흥할 것이고, 야구도 되살아날 것"이라고 희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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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야구학회 이사

협력=서영원 한국야구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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