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대자루·물감과 끈질긴 싸움” 87세 화백은 60년째 실험 중
단색화 거장 하종현 개인전
국제갤러리 서울서 다음달 13일 까지…4월 베네치아서 회고전
[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압력이 느껴져? 세계는 말이야, 압력에 의해 이뤄진 것 같아. 압력으로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구분한 거지.” 소설가 박민규는 ‘깊’에서 체감하지 못하는 압력에 대해 세계를 구분하는 기준이라고 설명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의 무게는 1cm 면적에 1kg 질량의 물체가 누르는 힘보다 강하다. 하지만 인간은 그 압력을 느끼지 못한다.
단색화의 거장 하종현(87) 화백은 느껴지지 않는 압력의 존재를 60년째 궁구하는 탐험가다. 보이지 않으나 분명 존재하는 강력한 힘을 캔버스가 아닌 마대자루 위에 물성을 통해 입증해보이는 과학자다. 그는 “평생을 마대와 싸워왔다”고 말한다.
하 화백의 개인전 'Ha Chong-Hyun(하종현)'이 종로구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지난 15일 개막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무채색의 기존 ‘접합’ 연작과 ‘다채색 접합’, 신작인 ‘이후 접합’ 연작까지 40여점을 선보인다.
올이 굵은 마(麻)포 뒤에 두껍게 물감을 바른 뒤 천의 앞면으로 이를 밀어 넣는 배압법(背押法)을 고안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기법으로 승화시킨 하 화백은 1970년대부터 이를 응용한 접합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6.25 전쟁이 끝나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데 캔버스와 물감은 비싸서 못 사니까 고민 끝에 마대를 떠올렸다”며 “직접 남대문 시장에서 끊어다 작업하면서 끈질긴 싸움을 이어오고 있다”고 했다.
빳빳한 캔버스와 달리 흐물흐물 성긴 마대를 고정시키려 뒷면에 두껍게 물감을 칠한 작가는 그 큰 틈새로 비져나오는 물감이 이룬 무늬에 주목했다. 쌀이 귀하던 시절, 원조식량을 담던 마대는 작가의 손끝에서 새로운 화폭으로 거듭났다. 그렇게 탄생한 ‘접합’(Conjunction) 연작은 잠재된 정서를 붙잡아 집요한 노동으로 이를 회화로 소환시킨 작가의 지난한 여정의 기록이다.
백자 또는 기왓장을 연상시키는 고아한 선과 색채에서 한 발 더 나아간 다양한 색의 접합 신작은 마포 뒷면의 붓터치가 앞면에서 다시 밝은 색을 얹는 방식으로 새롭게 변주된다. 한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게 싫다는 하 화백은 “내 작품은 시대마다 달라진다”며 “작품이 좀 팔릴 만하면 다른 시도로 안 팔리는 작품을 시도했다”고 웃어보였다.
2010년부터 작가가 새롭게 시도한 ‘이후 접합(Post-Conjunction)’은 배압법을 응용해 색과 형태에서 화면을 재구성한다. 일정 크기의 나무 합판을 얇은 직선 형태로 자른 뒤 각각의 나무 조각을 일일이 먹이나 물감을 칠한 캔버스 천으로 감싸고 나무 조각 위에 유화 물감을 약간 짠 다음 또 다른 조각을 얹는 방식이다. 압력에 의해 물감은 조각 사이로 스며 나오고, 이 위에 작가는 스크래치 또는 덧칠을 통해 리듬감을 극대화 시켰다. 보이지 않는 압력을 물성을 통해 조각처럼 입체적으로 구현한 작가의 시도는 회화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끝없는 인간의 도전으로 읽힌다.
하 화백은 “변화를 추구하다보면 자갈밭도 지나고 폭포 아래도 지나게되지만 그 변화의 노정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예전엔 작품이 잘 팔렸으면 했는데 지금은 잘 팔려 흩어질까 겁이난다”고 고백한다. 이어 그는 “평생 새로운 것을 해왔는데, 이제는 매듭을 짓고 정리할 때가 됐다는 생각을 한다”며 “내가 남긴 흔적, 땀 흘려 그린 작품을 한데 모아 보여줄 자리를 만들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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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4월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회고전을 앞둔 하 화백은 이어 9월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블럼&포갤러리, 내년에는 파리 알민 레쉬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이어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다음 달 13일까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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