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귀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정은귀 한국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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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시월이 되면 노벨상이 발표된다. 올해는 영국에서 활동 중인 난민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에게 상이 돌아갔다. 잘 알려지지 않은 소설가여서 다들 놀랐고 우리말로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아 독자들의 궁금증은 긴 기다림으로 바뀌었다. 이런 상황 앞에서 늘 생각하는 것은 문학번역의 중요성과 번역가의 역할이다. 문학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일의 다양한 경험과 공감을 나누고 이 세계를 잘 이해하는 일이다. 문학번역은 문화의 수준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이며, 문학 중에서도 시는 언어를 벼려낸 예민한 감각으로 독자를 만난다. 우리 시를 영어로 옮겨 해외에 소개하고 영미시를 우리말로 옮겨 독자를 만나는 필자는, 노벨상 시즌에 상업적 특수로 번역의 중요성이 반짝,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작년에 노벨문학상을 탄 시인 루이즈 글릭의 경우에도 번역을 고대하는 독자들이 많다. 언제 나오나요? 라는 독자를 만나면 마음이 급해지기도 한다. 시 연구자이자 번역가로서의 정체성에 더해 독자의 입장이 되어서 고민하다보면 번역에 마침표를 찍기가 쉽지 않다. 최근에 오래 고민한 구절 하나를 예로 들어 역자의 재밌고도 고된 고민을 나누고자 한다.

시에서 “마음을 발가벗기다”로 옮긴 구절이 있다. 절망을 나누는 이야기로 시인의 시적인 결단이 도드라진 부분이다. 이 번역을 두고 편집자는 “마음을 드러내다”로 톤을 좀 부드럽게 하자고 한다. 더 예쁜 표현으로 가자는 요청은 독자들에게 친절하고 싶은 편집의 소망을 여실히 보여주고 그걸 잘 아는 역자의 고민은 거듭된다. 나는 묻는다. 독자들은 과연 어떤 시를 기대하고 있을까?


내 대답은, 독자들은 예쁜 시가 아니라 좋은 시를 만나고 싶어 할 것이란 것이다. 최근 열린 번역 관련 국제 심포지엄에서 시카고 대학의 저명한 번역 학자는 ‘번역가는 배우다’라고 했다. 문학 번역에 대한 적절한 비유다. 배우가 예쁘게 연기하고자만 하면 역할을 망친다. 앞의 예로 돌아가 보자. 당신은 자기 절망을 상대방에게 강요해 본 적이 있는지? 혹은 자기 절망을 반복하여 말하는 사람을 오래 마주한 적이 있는지? 동사 “bare”를 선택하며 시인이 그린 마음 풍경에서 “드러내다”는 좀 평범하게 들린다. 절망을 강요하여 상대에게 이입하는 일, 말하는 이나 듣는 이나 마음에 상처가 깊이 남는, 영혼이 탈탈 털린다고 표현하는 그런 관계의 아픔, 살면서 가끔 앓는다. 그 아픔을 지나야 서로를 더 잘 보고 사랑은 그 헐벗음까지 껴안으며 성장한다. 고심 끝에 “발가벗기다”를 고수하여 원고를 보냈다. 번역과 편집이 결국 독자를 향한 같은 마음인데 우리가 이리도 치열하게 고민하는지 독자들은 아실까 싶어 혼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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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예쁘고 쉬운 언어로 독자를 만나고픈 소망과 원시의 목소리를 잘 재현하는 배우의 소망을 함께 놓고 고민한다. 예쁜 배우이기 전에 좋은 시를 잘 들려주는 번역-배우가 되고 싶다. 번역은 작품을 해석하는 비평 작업이 곁들여진 언어행위다. 두 다른 언어 사이, 번역과 편집과 출판의 복잡한 과정이 어우러져 합주되는 공동 작업으로 하나의 시집이 나와 독자를 만난다. 독자를 보듬는 일이 번역의 윤리와 어긋나지 않기를 고민하며 오늘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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