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정부에 조선인 전범 분쟁 해결 작위의무 없어"… 헌법소원 5(각하):4(위헌) 각하
[아시아경제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으로 동원됐다가 전범으로 처벌받은 조선인 피해자들이 일본에 대해 갖는 배상청구권 문제와 관련해 정부에 분쟁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작위의무가 없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31일 헌재는 조선인 전범 생존자들의 모임인 동진회 회원과 유족들이 한국 정부가 자국 출신 전범 문제를 방치해 이들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어 이를 확인해 달라며 외교부장관을 상대로 낸 헌법소원심판 청구 사건에서 재판관 5(각하)대4(위헌) 의견으로 각하 결정했다.
이번 헌법소원을 청구한 청구인들은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 당시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포로감시원으로 강제동원돼 동남아시아 각국에 위치한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하다가 전쟁이 끝난 뒤 연합국인 영국, 네덜란드, 호주 등에서 이뤄진 국제전법재판에서 비씨(BC)급 전범으로 처벌받은 피해자 혹은 그 유족들이다.
청구인들은 2014년 10월 헌법소원을 청구하며 한국이 일본과 1965년 체결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에 따라 자신들이 일본에 대해 갖는 배상청구권이 소멸됐는지 여부에 대해 한일 정부간에 해석상 분쟁이 존재하기 때문에 정부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치를 취할 작위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해당 협정 제3조가 정한 절차에 따른 분쟁 해결 조치를 취하지 않음으로써, 그 같은 부작위로 인해 청구인들의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재산권 등 기본권을 침해해 위헌임을 확인해줄 것을 헌재에 청구했다.
헌재는 청구인들이 주장하는 피해를 ▲한국인 BC급 전범들이 국제전범재판에 따른 처벌로 입은 피해와 ▲그 밖의 일제의 강제동원에서 일제에 의한 반인도적이고 불법적인 행위로 인하여 입은 피해 등 2가지로 나눠서 정부의 구체적인 작위의무가 있는지, 또 그 같은 의무를 불이행함으로써 청구인들의 기본권을 침해했는지 판단했다.
먼저 유남석 헌재소장과 이선애·이영진·문형배 재판관 등 4명은 국제전범재판에 따른 처벌로 입은 피해의 경우 국제법 존중의 원칙상 국제전범재판소의 국제법적 지위와 판결의 효력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한일 간 위 협정의 대상이 된다고 보기 어려워 이로 인해 피해자들이 입은 피해와 관련 정부가 협정 제3조에 따라 분쟁해결절차로 나아갈 의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다만 이들 재판관들은 "일제강점기 한국인 BC급 전범들이 일제에 의해 포로감시원으로 강제동원돼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다가 국제전범재판소에 회부돼 제대로 된 조력을 받지 못하고 처벌을 받은 안타까운 역사적 사실은 인정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재판관들은 "국제전범재판소 판결에 따른 처벌을 받아서 생긴 한국인 BC급 전범의 피해 보상 문제를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나 원폭피해자 등이 갖는 일제의 반인도적 불법행위로 인한 배상청구권의 문제와 동일한 범주로 보아서 이 사건 협정의 대상이 된다고 보기 어렵다"며 "정부에 구체적 작위의무가 인정된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이 부분과 관련한 심판청구는 부적법하다'고 결론 냈다.
한편 일제의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와 관련 재판관들은 동진회 단체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국제전범재판소에서 처벌받은 피해 보상을 요구해 일부 보상을 받은 적이 있고, 한국 정부는 위 협정과 무관하게 일본이 주도적으로 책임져야 할 문제라는 태도를 취하며 일본측에 입법을 통한 해결을 지속적으로 촉구해온 만큼 이를 둘러싸고 한일 양국 사이의 분쟁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지 불투명하다고 판단했다. 아직 한일간 분쟁이 미성숙한 상태이기 때문에 정부가 협정 제3조에 따라 분쟁해결절차로 나아갈 작위의무가 없다고 본 것.
재판관들은 이처럼 아직 분쟁이 미성숙했다는 점 외에도 외교부가 그동안 외교적 경로를 통해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에 관한 전반적인 해결 및 보상 등을 일본 측에 지속적으로 요구하여 온 이상, 작위의무를 불이행했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판단했다.
한편 이종석 재판관은 이 같은 헌재 법정의견과 다른 논거를 들며 각하 의견을 냈다.
이 재판관은 "헌법 제10조, 제2조 2항의 규정이나 헌법 전문으로부터 우리 정부가 청구인들에 대해 부담하는 작위의무가 도출된다고 볼 수 없고, 또한 이 사건 협정으로부터도 청구인들을 위해 협정상 분쟁해결절차로 나아가야 할 작위의무가 도출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석태·이은애·김기영·이미선 등 4명의 재판관은 국제전범재판에 따른 처벌로 인한 피해 부분에 대해서는 다수의견(각하)과 같은 의견을 냈다.
반면 이들 4명의 재판관은 일제의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와 관련해선 정부의 작위의무와 작위의무 불이행을 인정, "피청구인이 이 사건 협정 제3조에 따른 분쟁해결절차에 나아가지 아니한 부작위가 청구인들의 기본권을 침해하여 위헌임을 확인한다'며 반대의견을 냈다.
반대의견을 낸 4인의 재판관들은 "일제강점기 한국인 BC급 전범들은 태평양 전쟁 당시 10대 후반 내지 20대의 어린 나이에 포로감시원으로서 반인도적이고 불법적인 방법으로 강제동원돼 일본군 상관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명령에 복종한 채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정신적·육체적 피해를 입었다"고 전제했다.
이어 "이들은 이러한 일제에 의한 반인도적이고 불법적인 행위로 인한 피해를 인정받아 진상규명법에 의해 설치된 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강제동원 피해자 또는 희생자'로 인정됐다"며 "따라서 한국인 BC급 전범들은 일본에 대해 일제에 의한 불법적인 강제동원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청구권을 가진다고 할 것이고, 이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와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반인도적 불법행위로 인하여 입은 피해에 대한 청구권과 그 성격이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재판관들은 또 "한국인 BC급 전범들이 일제의 강제동원으로 인해 입은 피해에 대한 청구권이 이 사건 협정으로 소멸했는지 여부에 관한 한·일 양국 간의 해석상의 분쟁이 존재하고, 우리 헌법 제10조 및 전문, 이 사건 협정 제3조의 문언 등에 비춰볼 때 피청구인이 이 사건 협정 제3조에 따른 분쟁해결절차에 나아갈 구체적 작위의무도 존재한다"고 판단했다.
재판관들은 "기본권의 중대성, 기본권 침해 구제의 절박성, 기본권의 구제가능성, 진정으로 국익에 반하는지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피청구인이 한국인 BC급 전범들이 일본에게 가지는 일제의 불법적인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청구권과 관련해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이 사건 협정의 해석상의 분쟁이 존재함에도 분쟁해결절차에 나아가지 아니한 부작위는 청구인들의 중대한 기본권을 침해해 위헌이라고 할 것"이라고 결론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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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소원이 인용되기 위해서는 재판관 6명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 일제의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와 관련해 재판관 4명이 정부의 부작위가 전범 피해자들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의견을 냈지만 헌법소원 인용에 필요한 정족수(6명)에 이르지 못해 이번 사건에 대한 헌재 법정의견은 각하로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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