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민의 식의약이야기] 유통기한과 소비기한, 무엇이 좋은걸까
우리가 식품을 구매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제품 포장지에 적혀 있는 유통기한이다. 누구나 신선하고 막 만들어 놓은 먹거리를 선호하다 보니 유통기한이 길게 남아 있는 제품을 고르게 마련이다. 비단 소비자뿐만 아니라 식품의약품안전처나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이 식품업체를 단속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것도 유통기한이다. 유통기한 경과 제품을 보관만 해도 형사처벌과 영업정지 같은 행정처분을 동시에 받는다. 만일 유통기한이 경과된 원료를 식품 제조에 사용했다면 구속까지 될 수 있는 매우 중대한 사건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우리는 제도가 생긴 1985년부터 지금까지 유통기한을 신주단지 모시듯 중히 여기면서 살아왔다.
미국, 캐나다, 유럽연합(EU), 영국 등은 유통기한이나 제조일자 대신 소비기한이나 품질유지기한을 표시하는 제도를 사용한다. 미국의 경우 유통기한을 표시할 수는 있지만 우리와 달리 강제조항이 아닌 자율조항이다. 우선 유통기한은 식품업계를 행정기관이 관리하기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실제 식품의 섭취기한이 줄어든다는 명백한 단점이 있다. 특히 이로 인해 음식물쓰레기 처리 비용을 포함한 환경 문제가 대두되며 식품산업계는 업체의 이해관계에 따라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그런데 최근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소비자를 위한다면서 유통기한 제도를 폐기하고 소비기한을 도입하려고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여기에 우유나 치즈 제품과 관련된 낙농협회에서는 소비기한 제도를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다. 또한 2020년 7월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식품 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고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연말까지 제도화를 위해 법령 개정 작업에 들어간다. 이런 과정을 보면 유통기한보다는 소비기한이 뭔가 더 좋으니까 국회나 식약처가 개정하려는구나라고 생각하기 쉽다. 과연 소비기한이 무조건 소비자에게 좋은 걸까? 그러면 지난 40여년간 우리는 왜 소비기한 대신 유통기한 제도를 시행한 걸까라는 의문도 생길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식약처는 소비기한 제도 도입에 매우 미온적이었고, 산업계의 요구를 지켜보자는 입장이었다. 실제로 2019년 9월27일 개최된 식량낭비 감축을 위한 협력방안에 관한 세미나에 참석한 식약처 관계자는 "소비기한 제도로 변경하더라도 소비자에게 특별한 실익이 없어 굳이 추진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라는 회의적 입장을 내 놓은 바 있다. 식약처가 최근 이렇게 적극적으로 바뀐 결정적 이유는 바로 상명하달식 정책 추진의 결과로 보인다. ‘2021 P4G 서울 녹색미래 정상회의’ 개최를 계기로 기후변화 대응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식품·의약품 분야의 주요 제도 개선 내용에 소비기한 제도를 통한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가 포함됐고 현 정권의 정책 방향에 발맞추려다 보니 급작스럽게 소비기한 도입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입장이 뒤바뀐 것은 비단 식약처만이 아닌 식품산업계도 마찬가지다. 주요 식품기업들이 설립한 동업자단체인 사단법인 식품산업협회도 최근까지 소비기한 제도 추진이 산업계에도 큰 이익이 없으며, 소비자에게도 혜택이 없기 때문에 굳이 변경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로 일관해 왔다. 그러다 일부 식품대기업들의 냉장온도 기준 변경 주장과 함께 식약처의 소비기한 제도 추진에 호응하고 있어 의아할 따름이다. 하지만 모든 식품업계가 한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고 낙농제품이나 온도에 민감한 제품을 생산 및 판매하는 업체는 극렬하게 반대하는 의견을 표명하고 있다. 결국 소비자는 안중에 없고, 이해집단 간의 힘겨루기로 보일 수 있다.
소비자 측면으로 돌아와 생각해 보자. 소비기한으로 변경하면 일단 구매한 식품을 유통기한 제도하에서는 1개월 정도 사용이 가능했는데 통상 2~3개월 정도로 연장될 수 있다. 상당한 이익처럼 보이지만 꼼꼼히 따져보면 여러 가지 전제 조건이 수반된다. 소비자가 온도관리 등 보관을 잘해야만 한다. 냉장온도 유지가 필요인 제품에 대해서는 온도가 몇 도만 높아져도 보관 가능 기한이 현격하게 감소할 수 있고, 제품이 변질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가정 내 냉장온도가 매우 중요해 진다. 게다가 냉장고 온도는 기계적으로 표시된 것이나 제품 표면온도가 아니라 제품의 내부 온도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냉장고에 표시된 것보다 더 낮아야 품온 유지가 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지금처럼 냉장고에 지나치게 많이 보관해서는 안 된다. 결국 보관 및 유지책임이 소비자에게 전가되는 효과가 있다. 때문에 ‘냉장고에 넣어 두면 안전하다’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일반 소비자들을 위해 제도 시행전 장기간에 걸친 홍보와 교육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이 같은 노력 없이 하루아침에 소비기한 변경이라는 정책을 밀어붙일 경우 식품업계는 물론 소비자들의 피해도 늘어날 수밖에 없어 시작부터 졸속논란이 불거질 것이다.
실제 소비기한 제도 시행으로 소비자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냉장식품의 구매빈도가 줄어들어 1주일에 한 번 사고 유통기한이 지나면 버렸던 우유를 좀 더 오래 보관해 자주 안 사도 된다는 것 외에는 소비자에게 전혀 실익이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통업체들이 버리는 음식물들이 줄어 음식물 쓰레기가 줄어들 것으로 보는 이도 많지만 소비기한이 아직 남았다고 막 입고된 제품 대신 고를 소비자가 많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결국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는 상당할 수밖에 없다.
결국 어떤 제도가 좋은 것인지보다 제도를 어떻게 운용하는지가 중요하다. 굳이 소비기한 제도를 시행하려 한다면 영업자 관리·감독을 위한 유통기한과 소비자 이익을 위한 소비기한을 병행 표시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급하게 음식을 섭취하면 체하듯이 모든 정책도 어떤 결과가 발생할지 수많은 검토와 연구를 통해 장기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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