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승리호'가 보여주는 미래
2092년 압축성장·과소비로 병든 지구 인류 95% 생존 위협
황백색 먼지·방독면·폐허…투박하고 암울한 모습으로 그려
풍부한 색조로 가족애 부각도…K무비 놀라운 비주얼 구현

[이종길의 영화읽기]뒤엉킨 고철 떠도는 삶, 이게 우리의 미래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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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영화 ‘승리호’의 배경은 2092년이다. 지구는 압축성장과 과소비로 병들었다. 심각한 기후변화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다. 개연성을 갖춘 허구다. 문명은 자연의 순환을 왜곡한다. 생활과 생산 과정에서 물질을 채취·활용한다. 순환을 거스르는 배출물은 돌려보낸다. 대개 도시 외곽의 경계지역으로 향한다. 빈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쓰레기도 계급의 지형학을 따른다. 소란 피우며 반대하면 금전적 보상이 돌아간다. 실업문제가 심각했던 미국 버지니아주 웰시는 다달이 쓰레기 30만t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800만달러와 일자리 367개, 폐수처리장 건설 등을 얻어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털리타운도 뉴욕·뉴저지에서 오는 쓰레기 1500만t을 받는 대신 15년간 해마다 4800만달러를 받았다.

‘승리호’에서 지구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 인류의 95%가 생존을 위협받는다. 나머지 5%만 우주기업 UTS가 세운 시민거주단지에서 안락한 삶을 누린다. 건설 과정에서 생긴 우주쓰레기는 지구인이 치운다. 장선장(김태리)과 태호(송중기), 타이거 박(진선규), 업동이(유해진)…. 1990년대 이후 사라져간 넝마주이의 재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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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홍일 컨셉아티스트가 승리호를 투박하게 묘사한 이유는 여기 있다. 얼기설기 뒤엉킨 고철덩어리에서 노동자의 지친 삶이 전해지길 바랐다. 가재도구가 이리저리 널린 내부도 마찬가지. 그는 "정리되지 않은 자취방 사진 등을 많이 참고했다"고 말했다.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쓰는 물건으로부터 착안해 내부를 구성하며 어지러운 느낌을 부여했다. 초기 시안은 멋진 우주선이었다. 작업하면서 쓰레기 청소차의 외형을 닮아갔다. 폐품을 싣고 나르는 투박한 성질에 집중했다."

정성진 VFX(시각효과)슈퍼바이저는 "도로에서 미친 듯 달려가는 렉카차와 낡은 간판, 잡동사니(공구) 시장 등의 분위기를 담으려 노력했다"고 밝혔다. "영화에 잘 나타나지 않지만 하나하나 독창성이 부여돼 있다. 할리우드와 비교할 만한 지점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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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호’는 비관적인 색채로만 일관하진 않는다. 풍부한 색조와 해학적 소품으로 가족애도 부각한다. 조성희 감독의 전작 ‘늑대소년(2012)’,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2016)’처럼 회색빛 세계 안에서 희망을 암시한다. 안 컨셉아티스트는 "사람 냄새 나는 공간으로 구상하다 보니 먹다 남은 음식, 아무 데나 널린 빨래 등 다양한 이미지가 떠올랐다"면서도 "단번에 통과한 디자인이 없을 만큼 만들기 어려웠다"고 털어놓았다.


폐허로 전락한 지구 관련 디자인도 매한가지였다. 빌딩숲 사이에 자리한 최첨단 우주터미널과 사방을 가득 메운 황백색 먼지. 사람들은 하나같이 방독면을 쓰고 다닌다. 안 컨셉아티스트는 "쓰레기로 뒤덮인 지구와 이를 뒤지며 살아가는 사람들, 미세먼지, 황무지, 폐허, 거대 건물이라는 키워드로 많은 자료를 수집했다"며 "애초 배경은 한국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도입부의 이순신 장군 동상은 설계 단계에 없던 설정이다. 조 감독이 한국적인 디자인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긴 했다. 공감이 갔으나 정의하기 어려웠다. 그저 한국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만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런 색채가 묻은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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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와 대조되는 UTS 시민거주단지는 긴 수조에서 반구 형태로 바뀌어 표현됐다. "서울의 절반 크기로 설계했다. 그런 거주단지가 수십 곳 있다는 설정이다. 지구 주위로 원을 그리며 자전하는 구조다." 정 슈퍼바이저의 설명이다.


내부에는 미래형 건물들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있다. 유토피아 같지만 모두 인위적이다. 설리반 UTS 회장(리처드 아미티지)이 처음 등장하는 신의 경우 하늘과 구름마저 의도적으로 부자연스럽게 나타난다. 본래 높은 빌딩에서 시민거주단지를 내려다보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인공적 느낌을 주기 위해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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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우리의 미래일 수 있다. 현재 살아가는 장소와 진보된 기술로 제작된 물건들은 과거 예지자들이 그려낸 미래의 모습이다. 할리우드에서는 비주얼퓨처리스트 시드 미드(1933~2019)가 그런 세계를 가리켰다. 정확한 논증과 디자인 요소로 실존하는 느낌을 부여했다. 미드는 ‘에일리언(1979)’·‘블레이드 러너(1982)’·‘엘리시움(2013)’ 등에서 인간과 기계가 공존하는 세계를 그렸다.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기술적으로 성숙해진 산업에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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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는 ‘승리호’로 놀라운 비주얼 구현에 성공했다. 이제 장엄하고 이상적인 감정까지 불러일으키는 힘을 보여줄 수 있을까. 정 슈퍼바이저의 회고에 기대를 걸어본다. "‘승리호’를 작업하며 우주가 정말 창의적인 공간으로 느껴졌다. 상상을 두려움 안에 가두지 않으려 한다. 조금 더 펼쳐도 된다는 확신을 얻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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