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그리고 20학번 이서연] <中>남성 디폴트를 거부한다

[신년기획] 거대 남성 디폴트를 들어올리는 '연대의 레버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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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준이, 공병선, 이준형 기자] 서울의 한 여자대학교 20학번 이예나(19ㆍ가명)씨는 고등학교 시절 학생회장에 당선된 후 학교 급식줄(배식 순서)부터 바꿨다. 3개 급식줄 가운데 남학생은 2줄, 나머지 한줄만 여학생 몫인 탓에 여학생들은 늦게 식사를 해야만 했다. 특히 급식줄이 야외로 이어져 무더위 땡볕을 견디거나 비바람과 눈보라와 사투를 벌였다. 이씨는 남학생반 학급반장들을 설득해 남녀 1개씩 급식줄을 사용하되, 나머지 한줄은 남녀가 15명씩 순서대로 먹기로 했다. 이씨는 "학교 측은 남자들이 밥을 빨리 먹으니 당연하다는 인식이어서 하나씩 바꿔나가고 싶었다"고 했다. 20학번 이서연들은 참지 않았다. 82년생 김지영들이 어머니 세대부터 이어진 성차별 등 남성주심 사회구조에 체념했다면, 20학번 이서연들은 남성 디폴트(기본값)를 거부하며 집단 행동에 나서고 있다.


"男 중심 사회구조 타파" 뭉친 서연이들
N번방·미투운동으로 촉발된 위기 의식
해시태그·국민청원·시위로 공감대 확산
全 성별·세대 아우르는 차별 해소 시발점

20학번 이서연은 '참지않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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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가 부당한 교칙을 바꾸기 위해 적극 나선데는 '스쿨 미투(학교 성폭력 폭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친구들이 남성 교사의 성추행 증거를 모아 언론사에 제보, 기사도 보도됐지만 학교 측은 해당 교사에 대한 징계조차 없었다. 이씨는 "남성 교사가 학생들을 성적 대상화하는데 아무런 대책도 세워지지 않아 화가 많이 났었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자신의 할머니가 하루에도 몇번씩 말씀하는 "여자는~"이라는 당부에도 "이제 그런 세대는 지났다"며 "남자가 예뻐야하고 남자가 집안일을 다해야한다"고 조근조근 설명한다.

직장인 강민지(28·가명)씨도 1년여전 숏커트로 머리를 자른 뒤 "페미니스트 다 됐구나"라고 평가한 '남사친(남자사람친구)'과 멀어졌다. 강씨는 숏커트와 페미니스트를 연계한 친구에게 실망한 나머지 "도대체 어떤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이냐"고 쏘아 붙였고, "건설업계라 남성 동료들밖에 없어서 인식이 잘 못 잡힌것 같다"고 사과했다. 강씨는 "사과를 해서 고마웠다"며 "만약 실망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관계가 유지됐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는다"고 했다.


N번방과 미투, 연대의 출발점

지난해 7월 22일 '대학내 권력형 성폭력 해결을 위한 대학가 공동대응'이 서울대학교 음대 B교수의 파면을 요구하는 대학가 연대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대학가 공동대응 페이스북

지난해 7월 22일 '대학내 권력형 성폭력 해결을 위한 대학가 공동대응'이 서울대학교 음대 B교수의 파면을 요구하는 대학가 연대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대학가 공동대응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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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학번 이서연들의 '대항'은 개별 사건에 그치지 않았다. 각종 성차별ㆍ성범죄 문제에 적극적 대항하고 있다. 여성들끼리 모여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나 유명인의 성차별적 발언 등에 대해 논하거나 온라인상에서 해시태그 운동, 국민청원에 참여하는 것이 보편화됐다. 대학생 김지예(19·가명)씨는 "N번방 사건이 터졌을 때 주변 친구들과 이 이슈로 매일같이 토론하며 자기 일처럼 슬퍼했다"며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국민청원 참여 링크를 공유하는 친구들도 많았다"고 전했다.

온라인에서 시작된 연대는 직접 활동으로 확장됐다. 여러명이 함께 힘을 합쳐 행동하지 않으면 또 다시 잊힐 수밖에 없다는 공감대가 모아졌다. 전국 31개 대학권 단체들이 연합해 조직한 '대학 내 권력형 성폭력 해결을 위한 대학가 공동대응'(공동대응)은 대학 내 성폭력 문제를 실제 법안 발의로 이끌어내기 위해 꾸려졌다. 홍유서연 공동대응 기획단장(23)은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개인과 단체가 모여 집단행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대학권 페미니스트 공동체 유니브페미의 대표인 노서영(25)씨도 "개인으로 목소리를 냈을 땐 인신공격을 하거나 비웃는 사람들이 많았다"며 "단체를 만들고 나니 안전한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고 더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연대의 시발점은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였다. 당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 '메갈리아'와 미러링 등 여성혐오에 맞선 페미니즘이 부상했고, 2018년 미투는 여성 연대의 동력이 됐다. 정지윤(19·가명)씨는 "누군가 용기를 냈기 때문에 세상에 소리칠 수 있는 사람들이 늘었고, 양심의 가책 없이 하던 성적 농담이 적어도 이젠 양심의 가책은 느끼게 됐다"며 "이런 것들이 미투가 만든 변화"라고 설명했다.


페미니즘 리부트 5년

이서연들의 연대는 Z세대가 자란 시대적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크고 작은 성폭력을 직ㆍ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나도 당할수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고 굵직한 성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공감대가 표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국내 '미투 운동', 'N번방' 이 대표적이다. 손희정 연세대젠더연구소 연구원은 "온라인에서 활발하게 차별과 폭력의 경험을 공유하며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걸 자각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각에서는 신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젊은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압박이 심해진 결과가 20대 여성들을 움직였다는 분석도 나온다. 배은경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소녀시대와 같은 아이돌 등을 통한 성적대상화가 심해지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압박이 심해지고, 또 능력을 갖춰 이 사회에서 경쟁력 있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도 생겼다"면서 "신자유주의 안에서 자신이 경쟁력을 갖춘 개인 주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당연시하는데 세상은 '어린 여자'라고 얕봤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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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학번 이서연들의 연대는 '세대 공존'을 위한 중요한 지점이다. 20대 여성이 느끼는 '불평등'과 '차별'은 전 세대에 걸친 갈등 요소인 만큼 성별과 세대를 떠나 '차별 해소'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김동식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젠더폭력ㆍ안전연구센터 연구원은 "지금의 10대, 20대들이 연대하는 건 앞선 세대들이 성불평등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며 "결국 젊은 세대만이 아니라 전 세대가 연대하고 목소리를 내야 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장필화 한국여성재단 이사장은 "남성이 직접 나서서 젠더 갈등을 불식시키고 불평등한 상황에서 여성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남성 프리미엄"이라고 말했다.


박준이 기자 giver@asiae.co.kr
공병선 기자 mydillon@asiae.co.kr
이준형 기자 gils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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