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 냄새로 가족에게 미안하죠" 밤낮으로 뛰는 택배 기사들 한숨 [한기자가 간다]
택배노동자 또 쓰러져… 뇌출혈로 의식 잃은 채 발견
코로나19 여파로 주문 늘어 '쉴 틈' 없이 배송만
점심 먹을 시간도 없고 배송차량에서 겨우 끼니만 때워
[아시아경제 한승곤 기자] "퇴근하고 집 들어가면 땀 냄새로 가족에게 미안하죠."
서울 중구 한 건물 엘리베이터서 만난 40대 택배 노동자 김 모씨는 연신 배송지를 확인할 수 있는 개인휴대용 정보단말기(PDA)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김 씨는 택배 일을 시작하면 도무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물건을 나르고 배송할 때는 정말 정신이 없다"면서 "한숨 좀 돌리나 싶으면 어느새 어둑어둑한 저녁이다. 끼니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할 때가 많다"고 하소연했다.
김 씨는 택배 노동의 고단함을 말하면서 단말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바로 다음 배송지 확인 등 일정을 점검하고 고객에게 걸려온 전화 응대에 말 그대로 '쉴 틈'이 없어 보였다.
김 씨 상황과 같이 쉴 틈 없이 일하는 노동은 곧 과로사로 이어지기도 한다. 17일 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위원회(대책위)에 따르면 지난 14일 오후 서울 강동구의 한 아파트에서 한진택배 소속 택배기사 A씨(58) 뇌출혈로 의식 잃은 채 발견됐다.
A씨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져 수술받았고 지난 16일 의식 되찾고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다.
대책위는 "A씨가 오전 7시~오후 9시까지 하루 14시간 이상 일해 주당 근무시간이 80시간이 넘어갔다"며 "또 하루 평균 270~280개 물량을 나르는 등 과로에 시달렸다"고 주장했다. 한진택배는 "자세한 경위를 파악 중"이라고 밝혔다.
대책위에 따르면 올해 들어서만 택배 관련 노동자 15명이 과로사했다. 대책위는 "최근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가 격상되면서 택배 물량이 급증했다"며 "이달 초 부산에서도 롯데택배 소속 기사 한 분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졌다 수술을 받았다"고 밝혔다. 뇌출혈이나 심근경색 등 심혈관 질환은 대표적인 과로로 인한 질환으로 알려져 있다.
코로나19 상황에서 택배 노동자들은 업무 과중에 시달리고 있다. 늦은 시각에도 밀려오는 주문을 받고 배송을 이어간다. 사진=한승곤 기자 hsg@asiae.co.kr
원본보기 아이콘택배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은 한 조사 결과에서도 볼 수 있다. 최근 고용노동부가 쿠팡, 마켓컬리, SSG닷컴 등 온라인 유통업체 3곳의 배송기사와 물류센터 근로자 4,989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배송기사는 하루에 10시간가량 일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약 200개의 택배를 배송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다 보니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응답자의 52.3%는 일주일에 점심을 먹지 못하는 날이 있다고 답했다. 또 점심을 해결하더라도 배송차량에서 해결(29.9%)하거나 편의점에서 먹는다(17.6%)고 응답했다.
고용 형태도 불안정했다. 배송기사 중 84.5%는 계약직이었고, 정규직은 13.0%에 불과했다. 월평균 보수로 200~300만원을 번다는 답변이 68.1%로 가장 많았다. 기사들의 근로시간은 성수기 기준으로 8~10시간이 44.1%, 10~12시간은 40.2%였다. 성수기 평균 근로일수는 5일(66.9%)로 가장 높게 조사됐다.
이 가운데 고용부는 세 업체의 근로감독 실태조사 결과 총 196건의 노동관계법 위반 사례를 적발했다. 한 사업장은 배송량이 늘자 배송기사에게 주 12시간 이상 연장근로를 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또 11시간 이상 연속 업무를 주며 휴게시간을 보장하지 않은 곳도 있었다.
상황을 종합하면 택배 기사들은 불안전 노동과 강도 높은 근무 환경에 지속적으로 노출, 결국 과로사까지 이어지는 악순환의 굴레에 내몰려 있는 셈이다. 여기에 코로나19 사태로 배송 물류가 폭증하면서 이중고, 삼중고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열악한 근무 환경은 외신에서도 집중 조명한 바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16일 '한국의 택배원들은 과로(overwork)로 죽어간다'는 서울발 기사에서 "한국의 택배기사는 가장 열심히 일하면서도 가장 보호를 받지 못하는 노동자"라고 정의했다. NYT는 "한국에선 올 들어서만 15명의 택배기사가 숨졌는데, 그중엔 새벽부터 자정을 넘겨서까지 계속되는 업무를 견디지 못해 죽어간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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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택배 기사는 이 같은 상황에 대해 "먹고 살려고 하는 건데, 그러다 쓰러져서 죽는 동료(기사들)도 많고, 먹고 살려고 하다가 죽을 것 같다"고 토로했다. 이어 "과로사가 남의 일이 아니다. 언제 누가 또 쓰러질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이 말을 끝으로 또 다른 배송지로 급히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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