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의 '대학생 친구' 조영래를 아시나요
열악한 노동 환경 고발한 전태일
생전 '근로기준법' 해석해줄수 있는 '대학생 친구' 원해
조영래 변호사, '전태일 평전' 집필…전태일 외침 세상에 알려
[아시아경제 한승곤 기자] "아 내게도 대학생 친구가 있었더라면…."
1970년 11월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의 봉제공장 재단사로 일하다 비참한 노동 현실을 사회에 고발한 고 (故) 전태일 열사(이하 존칭생략)는 당시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구했지만, 한자가 너무 많아 해석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는 어려운 한자는 물론 법을 해석해줄 수 있는 대학생 친구가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훗날 인권변호사 고 조영래 변호사(이하 존칭생략)는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듣고 시국선언을 하는 등 전태일의 친구가 된다.
실제 조영래는 1947년생으로 전태일과 한 살 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전태일이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열악한 노동 환경을 사회에 고발할 수 있는 '대학생 친구'가 생긴 셈이다.
◆ 전태일의 친구 조영래, 전태일 평전 어떻게 썼나
1970년 11월13일 전태일이 분신했을 때 조영래는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다 친구에게 전태일 분신 소식을 듣고 곧바로 서울대 법대 학생장을 주도하고 시국선언문 초안을 작성했다.
당시 조영래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의 관련자로 수배되면서 1974년부터 1979년까지 6년간 도피 생활을 한다. 그중 3년간 전태일 어머니 이 여사를 만나 그와 함께한 봉제공장 노동자들을 알기 위해 청계천 일대를 누빈다.
그렇게 전태일의 일생을 정리한 조영래는 엄혹한 군부 독재로 인해 국내가 아닌 일본에서 1978년 '불꽃이여! 나를 태워라'라는 이름의 책을 출간한다.
국내에서는 1983년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으로 출판됐다. 그러나 저자를 밝힐 수 없었다. 원고 내용도 상당 부분 수정됐다. 또 출판되자마자 당국으로부터 즉각 판매금지조치를 당했다. 출판기념회도 원천 봉쇄를 당했다.
책 판매는 전태일기념관 건립위원회가 주관이 되어 서점을 통해서가 아니라 노동 운동 단체, 종교단체, 노동조합 등에서 조직적으로 판매를 하기 시작했다.
'전태일 평전'의 영향은 대단했다. 전국의 각 대학은 물론, 노동단체, 지식인, 종교인 등을 중심으로 필독서가 됐다. 이후 1991년 개정판을 내면서 저자 조영래 변호사 이름이 세상이 알려지고 책 내용도 원고대로 출판할 수 있었다.
'전태일 기념관'에 있는 1970년대 당시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봉제공장. 높이 1.5m도 되지 않는 열악한 노동 환경을 그대로 재현했다. 사진=한승곤 기자 hsg@asiae.co.kr
원본보기 아이콘◆ "노동자들 앉은자리서 몸 한번 돌려볼 수도 없어"
조영래는 '전태일 평전'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던 평화시장의 노동 환경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겉모습은 번드르르한 평화시장 3층 건물 내부에 빽빽이 들어차 있는 작업장들에 처음 들어가 보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그 질식할 듯한 탁한 공기와 그 지저분하고 어두침침한 분위기에 놀라게 된다"
이어 "가뜩이나 비좁은 작업장 안에 평당 4명 정도의 노동자가 밀집하여 일하고 있는 데다, 그나마도 각종 작업 설비와 비품과 도구들이 꽉 들어차 있어서 의자에 앉은 노동자들은 앉은자리에서 몸 한번 돌려볼 수도 없는 답답한 생활을 해야 한다"며 "작업장 한구석에 쌓인 원단 더미에서는 온종일 포르말린 냄새가 코를 찌른다"고 썼다.
노동조합인 '바보회'를 조직하던 전태일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다. "전태일의 설명은 이러하였다. 우리는 당당하게 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며 살 권리가 엄연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태껏 기계 취급을 받으며 업주들에게 부당한 학대를 받으면서도 바보처럼 찍소리 한번 못하고 살아왔다. 그러니 우리 재단사들의 모임은 바보들의 모임이다"
당시 평화시장 봉제공장의 비참한 노동 환경을 설명해주는 글. 사진 속 소녀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쉴새 없이 일 하고 있다.사진=한승곤 기자 hsg@asiae.co.kr
원본보기 아이콘이어 "이것을 우리가 철저하게 깨달아야 하며, 그래야만 언젠가는 우리도 바보 신세를 면할 수 있다. 또 그는 이런 이야기도 하였다. 재단사 모임을 시작하면서 그는 나이가 든 선배 재단사들을 찾아다니며 협조를 청하였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뭘 안다고 너희가 그런 엄청난 일을 벌이려 하느냐?”고 막으면서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설치는 놈은 '바보'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좋다. 우리가 한번 바보답게 되든 안 되든 들이박아나 보고 죽자. 이것이 그의 제안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전태일은 각종 어려움에 봉착한다. 동료들을 설득하는 어려움, '노동자가 뭘 할 수 있냐'는 주변의 냉소와 비야냥거림, 근로감독관, 언론들의 무시 등 그야말로 거리 위 홀로 서 있었다.
그럼에도 전태일은 바보회를 창립하여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 내용과 함께 노동조건의 부당성을 알리기 시작하고 설문을 통해 노동실태를 조사했다. 이후 노동자들은 개신교와 천주교 성직자들의 도움을 받아 열린 야학에 가서 노동법을 배웠고, 자신들이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부당한 현실에 분노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재봉틀이 아니다" 전태일의 이 외침은 노동자의 인권을 보장하라는 취지로 2020년 여전히 유효하다는 노동계의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한승곤 기자 hsg@asiae.co.kr
원본보기 아이콘한편 인권변호사로 사회적 약자를 위해 헌신한 조영래 변호사는 1990년 12월12일 43세에 폐암이 악화돼 숨을 거뒀다. 조영래 변소사는 1982년 2월 사법연수원 수료 후 이듬해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 및 시민공익법률상담소를 개소했다.
1984년 한국 사법사상 초유의 대규모 공익 집단 소송인 '망원동 수해 사건' 소송을 담당하고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여성조기정년제 철폐 소송',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변론을 맡았다. 또 군부독재 시절 인권변호사들의 모임인 '정의실천법조인회'(정법회) 발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창립과정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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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노동자 인권 활동가는 전태일과 조영래에 대해 "전태일이 그렇게 원하던 '대학생 친구'는 조영래다. 이후 수 많은 대학생들이 전태일의 친구가 되었다"라면서 "오늘날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 역시 전태일의 친구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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