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마다 최우선 공약으로 내놓는 '잘못된 금융규제 완화'
현실은 딴판…수백개 금융 규제 법안 발의에 금융사 옥죄기 일쑤
수년간 관치금융에 시련겪은 금융사들, 이젠 정치금융에 휘둘릴 판

국회의사당 /문호남 기자 munonam@

국회의사당 /문호남 기자 munonam@

AD
원본보기 아이콘


[이초희 금융부장]"금융법 체제도 기능별로 개편해서 규제의 일관성과 투명성을 높여나가겠다."

"국내 금융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관련 규제를 푸는 것이다."

"잘못된 규제는 아주 눈 딱 감고 풀어라, 전부."

"모험자본 투자에 걸림돌이 되는 금융규제 과감히 걷어내겠다."


위 발언의 주인공들이 누구인 지 유추할 수 있다면 당신은 시사 상식 '만렙'이라 자부해도 좋다. 하나같이 시장을 위해 '나쁜 규제'를 과감히 없애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누가 이처럼 자신있게 규제 해소를 약속할수 있겠는가. 바로 역대 대통령들이다.

첫번째 발언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4년 2월27일 참여정부 1주년 국제세미나에서 했던 말이다. 두번째 코멘트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으로 2008년 1월9일 금융사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했다. '눈 딱 감고 풀라'는 것은 2014년 9월3일 민관합동 규제개혁점검회의에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지시다. 이쯤되면 마지막 발언은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것.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3월21일 혁신금융 비전선포식에서 던진 선언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약속이나 한 듯 금융규제 혁신을 다짐했다. 역설적으로 새 대통령이 취임할 때 마다 산업 전반에 걸친 규제 해소를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다는 것은 결국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말도 된다.

물론 그간 청와대를 거쳐간 대통령들이 말만 해놓고 실천에 옮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역사의 평가는 다양할 수 있겠지만 규제 해소 만큼은 역대 청와대가 나름 많은 공을 들였던 분야 중 하나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는 여전히 규제 천국이라는 오명을 듣고 있으며, 산업계는 규제 해소를 부르짖고 있을까. 최근 금융권의 이슈 역시 금융그룹감독법을 비롯한 규제입법이다. 금융사들의 목줄을 움켜쥘 수 있는 법들로 국회의 5분의3을 장악한 여권이 강력하게 밀고 있는 사안이다.


역대 정권들은 모두 규제 해소를 첫번째 공약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그들의 정부는 오히려 자고 일어나면 시장을 옥죄는 규제를 쏟아냈다. 왜일까. 정부는 이익을 추구 하는 집단이 아니라 공익을 위해 움직이는 조직이다. 그들이 행하는 일은 민간기업처럼 '사업'이 아니라 공익을 확대하기 위한 '정책'이어야 한다. 공공의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사익을 제약하고 남는 이익을 공공에 나눠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사익을 제약당하는 쪽은 주로 민간기업들이다. 이 나라에서 규제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다.


역대 정권들이 모두 첫머리에서 규제 완화를 약속했지만, 사익과 공익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세련된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인간은 결국 쉽고 편한 길을 택하기 마련. 대부분의 정권들은 고민하는 대신 규제를 택했다. 그런데 '규제'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발전을 가로막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때문에 이를 '정책'이라는 말로 포장한다. 하지만 뒤끝에 남는 꺼림칙한 뉘앙스까지는 해소되지 않는다. 이렇게 정책을 가장한 규제들은 주로 대기업과 대형 금융사를 겨냥한다. 대중들에게 선동적 지지를 얻기 위해 가장 좋은 구도가 나오기 때문이다. 규제가 일종의 포퓰리즘인 셈이다.

AD

거대 여당은 총선 공약이라는 정치적 이유와 과반의석이라는 무기를 들고 규제법안을 모두 밀어붙힐 태세다. 이를 저지해야 할 야당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역사적 순간에 직면해 있다. 수 십 년 간 금융권의 병폐로 꼽혀왔던 '관치금융'이 저물고 대신 정치적 이해 관계에만 편승해 '정책'을 만들어내는 '정치금융'의 시대를 목전에 둔 것이다.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이다.


이초희 기자 cho77love@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보면 좋은 기사

새로보기

내 안의 인사이트 깨우기

취향저격 맞춤뉴스

많이 본 뉴스

당신을 위한 추천 콘텐츠

놓칠 수 없는 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