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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주체적 여성상의 퇴색

최종수정 2020.09.24 12:36 기사입력 2020.09.24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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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뮬란' 적극적이고 건강미 넘치는 여성 표현 급급
22년 전 동명 애니메이션 본질 조금도 꿰뚫지 못해

영화 '뮬란' 스틸 컷

영화 '뮬란' 스틸 컷



※ 이 기사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될 만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뮬란' 실사판은 주연 류이페이의 홍콩 민주화 시위대 비판 발언, 신장위구르자치구 촬영 같은 작품 외적인 문제들을 차치하더라도 논쟁거리가 많은 영화다. 동명 애니메이션(1998)이 가리킨 주체적인 여성상을 무참히 퇴색시켰다. 적극적이고 건강미 넘치는 여성을 표현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본질은 꿰뚫지 못했다.

초점은 어린 뮬란에 대한 묘사부터 어긋난다. 닭을 쫓다가 동네만 쑥대밭으로 만드는 사고뭉치. 니키 카로 감독은 두 가지를 가리킨다. 활발한 성격과 남다른 기운이다. 애니메이션은 후자를 담지 않았다. 오히려 평범한 여인으로 표현했다. 그 덕에 험난하게 펼쳐지는 여정으로 수월하게 공감대를 얻었다.


뮬란은 긴 머리를 자르고 연로한 아버지 대신 '핑'이라는 이름으로 군에 입대한다. 남자들보다 체력과 힘이 부족해 갖은 고생을 한다. 하지만 남다른 의지와 지혜를 발휘해 용맹한 병사로 성장한다. 그를 인정하지 않던 샹 대장에게도 동료로 인정받는다.


영화 '뮬란' 스틸 컷

영화 '뮬란' 스틸 컷



실사판에는 이렇게 발전하는 모습이 생략돼 있다. 비범한 무술 솜씨를 애써 숨기는 뮬란만 그려진다. 여자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야간 보초를 자청하고, 남자들이 버거워하는 훈련에서 똑같이 힘든 체한다. 여성이 겪는 사회적 차별은커녕 초인이 겪는 어려움을 가리킬 뿐이다.

뮬란은 자기처럼 비상한 능력이 있는 마녀 시아니앙(공리)과 마주하면서 숨겨 왔던 본 얼굴을 드러낸다. 갑옷을 벗어 던지고 여성의 얼굴로 전장에 뛰어든다. 그런데 갑옷은 몰래 챙겨온 아버지의 것이다. 그는 집을 떠나기 전날 밤, 아버지가 훈련하는 모습을 몰래 훔쳐본다. 부상한 다리를 움켜쥐는 모습에 아버지가 출전하면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애틋한 마음으로 입은 갑옷은 결국 아버지, 더 나아가 가족을 향한 사랑이다. 이를 남성 중심사회의 속박으로 표현함으로써 뮬란의 정체성은 모호해진다.


실사판에는 주체적인 여성의 필요성을 시사하는 대사도 없다. 애니메이션의 이야기를 그대로 따르는 듯하나 시종일관 표현이 서투르다. 훈족(실사판 유연족)의 황궁 잠입을 알아채고 샹 대장(실사판 텅 장군)에게 기습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장면이 대표적인 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뮬랸의 정체를 뒤늦게 알아챈 샹 대장을 뮬란이 직접 설득한다.


"그들이 살아 있어요. 근처에 있어요." "여기는 네가 올 곳이 아니야. 돌아가." "샹,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믿어주세요." "내가 왜?" "내가 왜 돌아왔겠어요? 핑은 믿는다 하셨잖아요. 뮬란은 같은 사람이에요."


영화 '뮬란' 스틸 컷

영화 '뮬란' 스틸 컷



실사판에서는 뮬란의 동료인 홍휘가 호소를 대신한다. "준(실사판 뮬란 가명)은 믿으면서 뮬란은 왜 못 믿으시나요?" 카로 감독은 이미 적잖은 남성들이 여성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해명할 수 있다. 그러나 홍휘 또한 뒤늦게 뮬란의 정체를 알아챘다. 어떤 고민이나 갈등도 없이 뮬란을 위해 나선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뮬란이 추구하는 여성상은 현대사회에서 환영받을 수도 없다. 기존 사회체제에 그대로 흡수되기 때문이다. 그는 놀라운 무술로 보리 칸(제이슨 스콧 리)을 제압하고 황제(리롄제)에게 복종한다. 근위대 장교로 임명돼 기존 체제를 수호하는 앞잡이가 된다. 억압과 차별에 시달리는 여성들을 구제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남성 중심의 중매로 결혼을 앞둔 동생에게 축하를 건네며 기존 관습에 따르려 한다.


22년 전 개봉한 애니메이션은 실사판보다 훨씬 진보적이다. 뮬란의 활약으로 목숨을 구한 황제가 고개 숙여 감사한다. 뮬란은 황실 보좌관이 되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아예 등을 돌리는 것은 아니다. 문장과 검을 선물로 받고 황제를 꼭 부둥켜안는다. 가족들과 만나러 떠나는 뮬란을 보며 황제는 샹 대장에게 말한다. "역경을 이겨내고 핀 꽃이 제일 아름다운 꽃이니라. 1000년이 지나도 저런 여인은 없을 걸세."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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