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관 성비위 터져도 도움 요청 힘든 직원들
공무원 74.5% "성희롱 피해 있어도 참고 넘어가"
전문가 "지자체, 별도 감시·감독기관 있어야"

22일 오전 서울 중구 한 기자회견장에서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폭력 사건 2차 기자회견'을 앞두고 참석자들이 착석해 있다. / 사진=연합뉴스

22일 오전 서울 중구 한 기자회견장에서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폭력 사건 2차 기자회견'을 앞두고 참석자들이 착석해 있다. /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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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임주형 기자] "잘 몰라서 그런 거다.", "네가 예뻐서 그랬겠지."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전 비서 A 씨가 직장 동료들에게 고충을 호소하자 들었다는 말이다. A 씨 측은 22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지난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4년에 걸쳐 전·현직 비서관 등 20명에게 여러 차례 도움을 요청했으나, 직원들은 이를 묵인했다고 주장했다.

공직사회 내 성비위 문제가 잇따라 불거지는 가운데, 이같은 문제의 원인은 피해자가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위력'이 작용하는 조직 문제라는 지적이 나온다. 상관의 성희롱·성추행 피해를 호소해도 조직 내에서 자체적으로 묻힐 것을 알아챈 피해자가 낙담해 침묵하게 되고, 결국 더 큰 피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전문가는 공직사회 내 권력자의 성비위 등 문제를 감시·감독할 수 있는 견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날 A 씨 법률대리인 김재련 변호사에 따르면 A 씨는 자신이 입은 피해를 인사담당자에게 전달했으며, 일부 직장 동료들에게는 박 전 시장이 보내온 '텔레그램' 비밀 대화방 메시지와 속옷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직원들은 박 전 시장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일부는 '남은 30년 공무원 생활을 편하게 하도록 해 줄 테니 다시 비서로 와 달라'며 A 씨를 회유하기도 했다.


A 씨는 전직 비서실장인 B 씨에게도 인사이동을 요청했지만 후속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전하기도 했다. 서울시 내에서 성희롱 피해에 대한 적극적 조치가 이뤄지지 않자, A 씨는 결국 김 변호사와 상의 후 지난 8일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전 충남도 공보비서 김지은씨는 지난 2018년 3월 JTBC 방송 '뉴스룸'에 출연해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을 폭로했다. / 사진=연합뉴스

전 충남도 공보비서 김지은씨는 지난 2018년 3월 JTBC 방송 '뉴스룸'에 출연해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을 폭로했다. /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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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의 성비위에 대해 제때 문제 제기를 하지 못하고 함구하는 사례는 지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지난 11일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전북 임실군청 소속 한 여성 공무원은 숨지기 전 지인에게 '과거 성폭력 피해를 당한 간부와 앞으로 함께 일하게 돼 힘들 것 같다'는 문자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파악됐다.


지난 2018년 3월 JTBC 방송 '뉴스룸'에서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력 피해를 폭로했던 김지은 씨도 2017년 말부터 여러 차례 피해를 당해왔던 것으로 확인됐다.


여성가족부가 지난 2018년 6월 기초지방자치단체 공무원 10만8000명에게 온라인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자 11.1%는 '3년 이내에 성희롱 등 피해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피해 경험이 있다고 답한 응답자 중 74.5%는 '(피해 상황을) 그냥 참고 넘어간다'고 답했다.


또한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이 같은 해 10월 서울시 본청 및 자치구 공무원 등 직원 6810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 결과보고에 따르면 여성 직원 74.6%는 '성희롱을 문제 삼으면 직장 내 인간관계가 악화하는 등 피해자만 손해를 본다'는 데 동의했다.


공직사회 내 성비위 피해자가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은 조직 내 위압적 분위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공직사회 내 성비위 문제 / 사진=연합뉴스

공직사회 내 성비위 문제 /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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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씨는 안 전 지사의 성폭력을 고발한 554일간의 기록을 담은 자신의 저서 '김지은입니다'에서 "말할 수 없다, 문제제기할 수 없다, 그게 바로 위력"이라며 "그가 가진 권력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게 흐지부지 묻혀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 성폭행이 있었던 당시 즉각 수사기관에 말했더라도 제대로 수사가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고 토로했다.


권력자의 '위력'이 조직 내에 직·간접적으로 작용하는 환경에서는 피해자가 침묵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문가는 공직사회 내 권력자를 견제할 수 있는 별도의 감시·감독기구 설립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 교수는 지난 17일 한 라디오 방송에서 "지방자치단체는 성비위 관련 문제가 발생하면 징계권자인 지자체장에게 최종 보고를 하도록 되어 있다"며 "사실상 지자체는 감시·감독기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선출직인 시장이나 도지사 등이 선출되면, 과거 같이 선거운동을 했던 주변 인물들이 함께 활동하다 보니 내부에서 부적절한 행위가 발생했을 때 자체적으로 인지할 수 있느냐는 문제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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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이 때문에 제3의 조직, 이를테면 국가인권위원회나 지자체를 모니터링할 수 있는 조직을 따로 설립해 (성비위 문제를) 감독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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