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길의 가을귀]본인만 몰랐던 홈런왕의 癌 투병기
이재담 서울아산병원 교수 '무서운 의학사'
손도 못대던 전염병·희귀질환…숱한 희생으로 얻은 학문적 성과 살펴
"신사 숙녀 여러분, 감사합니다. 아시다시피 제 목소리가 좋지 않습니다. 썩 좋은 느낌이 아닙니다." 메이저리그 간판타자 베이브 루스(1895~1948)는 1947년 4월 27일 양키스타디움에서 고별사를 했다. 목소리는 7개월여 전부터 꺽꺽하게 쉬어 있었다. 왼쪽 안구 뒤쪽에 통증도 있었다. 주치의는 축농증으로 판단하고 충치 몇 개를 뽑았다. 그러나 증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고통으로 참을 수 없었던 루스는 뉴욕 맨해튼에 있는 프렌치 병원을 찾았다. 의사들은 왼쪽 입 천장과 성대에 마비가 있고 왼쪽 어깨에 힘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곧바로 엑스선 촬영에 들어가 머리뼈 기저부에서 종양을 발견했다. 이어진 방사선 치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 달 뒤 목 왼쪽 부위에도 종양이 생겨 병세만 심해졌다.
의사들은 종양을 절제하려 했다. 그러나 메스를 집어보지도 못하고 포기했다. 종양이 경동맥을 둘러싸고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방사선 치료에 의존해야 했던 루스는 3개월 사이 몸무게가 40㎏이나 줄었다. 계속 찾아오는 통증 탓에 하루도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이재담 서울아산병원 교수가 쓴 '무서운 의학사'ㆍ'위대한 의학사'ㆍ'이상한 의학사' 3부작은 세 키워드로 의학사를 들여다보는 기획서다. 첫 번째 '무서운 의학사'에서는 역사를 바꾼 치명적인 전염병과 그에 응전한 의사들, 등골이 서늘해지는 사건ㆍ사고 등이 다뤄진다. 잊혀서는 안 될 숱한 희생 위에 현대 의학이 존재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내일의 의학이 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희생정신을 발휘한 인물로 홈런 타자로만 알려진 루스도 거론된다. 뉴욕 웰컴 연구소의 조지 히칭스(1905~1998) 박사는 1942년 미생물 성장 억제제인 테롭테린이라는 물질을 발견했다. 테롭테린은 쥐에게 이식된 종양을 없애는 데 효과가 있었다. 엽산과 비슷한 구조로 항암 효과를 보였다.
리처드 루이슨 박사가 이끄는 뉴욕 마운트사이나이 병원의 연구진은 동물실험에 적용해온 테롭테린이 루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부작용으로 건강이 더 나빠질 수도 있지만 써보겠느냐고 루스에게 물었다. 쇠약해진 홈런왕은 용감하게 동의했다. "의료계가 장차 나와 같은 병을 앓는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자세한 내용은 별로 알고 싶지 않습니다."
루스는 뉴욕 양키스 팬들과 이별한 뒤 테롭테린 주사를 맞기 시작했다. 상태는 극적으로 호전됐다. 통증이 누그러져 진통제 사용량이 눈에 띄게 줄었다. 몸무게도 10㎏ 이상 늘었다. 한 달 뒤에는 목의 종양이 완전히 사라졌다. 고형식(固形食)을 삼킬 수 있었고, 목소리도 좋아졌다. 세인트루이스학회는 그해 테롭테린으로 암 치료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처음 보고했다.
그러나 약의 효과는 일시적이었다. 루스는 증세가 급속도로 악화해 1948년 6월 뉴욕 메모리얼 병원에 입원했다. 그는 오른쪽 폐에 생긴 대엽성 폐렴으로 그해 8월 16일 53세로 생을 마감했다. 루스의 가족과 의사들은 그가 암 환자였다는 사실에 대해 밝히기를 꺼렸다. 당시 풍조는 환자 본인에게 암에 걸렸음을 알리지 않는 것이었다. 언론도 이에 협조했다. 현대에 가장 잘 지켜진 비밀 가운데 하나라는 평가를 들을 정도였다.
루스 역시 자기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메모리얼 병원을 처음 찾았을 때 주치의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 여기 메모리얼 병원은 암 전문 병원이잖습니까? 왜 나를 이리로 데리고 온 거지요?" 루스가 코인두의 편평상피암으로 고통받았다는 사실은 부검 다음날 일간 뉴욕타임스에 의해 처음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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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코인두암 치료에 방사선 단독 치료보다 화학요법 병행이 더 효과적이라는 게 입증됐다. 루스는 의학 사상 최초로 방사선 및 엽산 저해 항암제로 병행 치료를 받은 코인두암 환자라는 또 하나의 기록을 남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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