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counter] '구실'이 '핑계'가 될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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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지난달 16일 소설가 김훈의 신간 '달 너머 달리는 말'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가 열린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 김훈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이 유행하는 현 상황과 관련해 "곳곳에 '예언가'와 '약장수'가 넘쳐난다"고 말한 것은 흥미로웠다. 혼란의 시대에 많은 매체에서 쏟아지는 말과 글이 혼란을 더 부채질한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매체가 다양해지고 속도가 강조되는 오늘날은 분명 말과 글이 과거보다 가벼이 다뤄지고 있다.


'언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과 글의 중함을 알려준다. 꼰대처럼 '중요하니 무조건 외워라' 하는 식이 아니다. 글쓴이는 특정 낱말의 연원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그 중요성을 알려준다. 낱말의 가장 작은 의미 단위인 의미소 분석을 통해서다. 글쓴이는 의미소 분석으로 낱말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과정을 '인수분해 학습법'이라고 칭한다. 이를 통해 우리말의 구성 원리를 살펴보고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파악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낱말을 써야 하는지 알려준다.

예를 들면 우리말로 똑같이 몸을 뜻하는 한자 신(身)과 체(體)가 어떻게 다른지, '아들은 어머니의 시신을 끌어안고 오열했다'라는 문장에서 왜 시체 대신 시신이 더 어울리는지 알려준다. 체와 신 모두 몸을 뜻한다. 하지만 신은 정신과 인격체를 포함한 인간 전체의 의미를 담고 있다. 반면 체는 몸 그 자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시체가 아닌 시신으로 표현해야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애틋함이 더 잘 전달된다.


나체화는 있지만 나신화는 왜 없는지, 왜 나신 시위가 아니라 나체 시위인지도 알려준다. 나신은 당사자가 공개할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이고, 나체는 당사자가 처음부터 남 앞에 드러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글쓴이는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나체와 나신이 똑같이 '알몸'이라고 설명된 것에 대해 불만을 드러낸다. 저자는 언어분석을 통해 나신과 나체의 경우처럼 대사전 풀이의 불완전함을 규명하고 개정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국립국어원의 무분별한 언어 순화에 대해서도 잘못된 점이 있으면 꼬집는다. 국립국어원이 '구실'을 토박이말인 '핑계'로 순화해 쓰라고 권하는 것을 글쓴이는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말뿐인 행위라는 뜻의 구실(口實)은 행실(行實)과 대비돼 그 의미가 뚜렷해진다. 그런데 구실을 핑계로 순화해버리면 행실과 대비되는 의미는 사라져버려 결과적으로 우리말 표현이 얕아지고 단순해진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적절하게 쓰인 한자어가 우리말을 한층 풍성하게 해준다고 강조한다. 특히 전통적인 한자 의미소 낱말들은 유불선의 고전, 역사적 고사 등에서 상당 부분 유래했기에 동아시아의 정신 세계도 담고 있다. 언어를 통해 자연스럽게 동아시아 사상과 철학도 공부할 수 있는 셈이다.


토박이말에 대한 저자의 애정도 곳곳에서 드러난다. 저자는 깊은 사유로 토박이말의 어원과 유래에 대해 납득할 만한 해석을 내놓는다. 우리말에서 '나'보다 특히 강조되는 '우리'라는 말은 '울타리', 다시 말해 '울'에서 왔을 것으로 추측한다.

참과 거짓의 유래에 대한 글쓴이의 해석도 흥미롭다. 글쓴이는 거짓을 가죽, 거죽과 더불어 '겉'에서 나온 말로 해석한다. 겉의 반대는 속이며 이것은 껍데기와 알맹이의 관계와 같다고 전제한 뒤 속이 들어찬 것은 참, 속이 들어차지 않은 것은 거짓이라고 풀이한다. 즉 '참'은 '차다'의 의미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에필로그에서 낱말의 의미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이유에 대해 밝힌다. 정확한 언어 능력과 사유 능력은 우리 삶의 질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언어가 각종 영상 매체의 위력 앞에 퇴보하고 있다며 이는 사유 능력과 소통 능력의 퇴보를 의미한다고 안타까워한다. 자신의 말과 글을 정확하게 들여다보는 일이 곧 자신을 성찰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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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 다르고 어 다르다/김철호 지음/돌베개)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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