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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한국유사] 삼국통일 마침표 찍은 기벌포 전투는 허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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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전쟁 종료 시점의 새로운 견해

나당연합군은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마저 멸망시켰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신라와 당은 한반도의 주도권을 두고 서로 대립하게 됐다. 바로 나당전쟁이다. 670년부터 본격화한 나당전쟁은 675년 매소성 전투를 거쳐 676년 기벌포 전투로 끝났다. 676년 11월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하면서 나당전쟁은 종결됐다. 이에 삼국통일 시점은 676년 11월이다.


국내 학계에서 나당전쟁의 종결 시점을 기벌포 전투로 보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하지만 일본과 중국 학계에서는 기벌포 전투를 전혀 다르게 바라본다. 일본의 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1879~1952)는 '삼국사기' 편찬자가 671년 발생한 사건을 676년 기사에 기재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봤다. 그 근거로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기록을 들었다.

기벌포 전투를 지휘한 당군 장수는 설인귀(薛仁貴)다. 이케우치는 상원연간(上元年間) 설인귀가 유배 중이어서 전투에 참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상원이란 674~676년 사용된 당의 연호다. 따라서 설인귀가 676년 벌어진 기벌포 전투에 참가할 수 없었으며 기벌포 전투는 676년이 아니라 671년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케우치의 견해에 일본 학자 후루하타 도루(古畑徹), 중국 학자 황웨써(黃約瑟·1953~1993)·류쥐(劉矩) 등이 적극 동조했다. 결국 일본과 중국 학계에서 기벌포 전투는 671년 일어난 것으로 인식하게 됐다.


한편 중국의 학자 바이건싱(拜根興)은 기벌포 전투가 671년 일어난 것으로 인식하진 않았다. 그러나 '삼국사기' 기록 자체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했다. 나당전쟁은 675년 매소성 전투 이전의 상황을 중시해야 한다며 기벌포 전투의 실재(實在)를 의심한 것이다.

최근 국내 학계에서도 일본과 중국 학계로부터 영향을 받은 연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기벌포 전투는 676년 11월이 아니라 675년 9월 혹은 675년 11월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새로운 견해의 공통점은 '삼국사기' 기록의 연도 작성에 오류가 있으며 기벌포 전투의 발생 시점을 675년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당전쟁의 종결과 삼국통일의 시점은 675년으로 재조정돼야 한다.

[이상훈의 한국유사] 삼국통일 마침표 찍은 기벌포 전투는 허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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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사학자 "671년 기록의 오류"
唐 설인귀 장군 유배 중 불참 주장
中 황웨써·류쥐 등 학자 적극동조
일부 국내학자도 "675년 가능성"

국내외 학계의 견해 차이는 국내 사서와 중국 사서의 기록을 둘러싼 신빙성 문제가 근본에 깔려 있다. 당시 세계 제국 당이 '변방의 소국(신라)'에 패했다는 기록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나당전쟁 기간 중 설인귀의 행적과 여기서 파생된 기벌포 전투의 실재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비롯된다.


분명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상원연간 설인귀가 중국 남부 상주(象州)로 유배됐다고 기록돼 있다(上元中坐事徙象州). 그러나 두 기록에는 설인귀가 왜 상주로 유배됐는지 구체적인 정황 설명이 없다. 유배된 시기도 명확하지 않다. 670년 설인귀가 토번(吐蕃)과 벌인 대비천(大非川) 전투에서 패배한 후 제명됐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점과는 대조적이다(官軍大敗仁貴坐除名). 다시 말해 상원연간에 '어떤 일(事)'로 유배됐다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정황 설명 없이 막연히 상원연간 유배됐다는 기록에 따라 '삼국사기'의 구체적인 기록을 일방적으로 부정하기는 어렵다. 이와 관련해 미국 학자 존 제이미슨은 흥미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나당전쟁에 출전한 당군 장수와 관련된 기록이 누락돼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유인궤(劉仁軌)는 승전 위주의 기록만 남아 있고 설인귀는 상원연간에 유배 중이었다고 애매하게 기록돼 있다. 게다가 이근행(李謹行), 이필(李弼), 양방(楊昉)의 열전 내용에는 한반도 관련 기사가 없다. 이근행과 같이 출전한 고간(高侃)은 개인 열전조차 없다.


이는 장수들의 활동 내용에서 나당전쟁 관련 기사가 의도적으로 누락됐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특히 유인궤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인궤는 나당전쟁에 투입된 인물 중 지위가 가장 높았다. 그는 당시 사서 기록을 담당한 감수국사(監修國史)였다. 세계 제국 당이 변방의 소국(신라)에 패한 사실(나당전쟁)을 기록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지우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경향은 백제 멸망 후 당에 투항한 백제 유민에게서도 발견된다. 웅진도독(熊津都督) 부여륭(扶餘隆)의 경우 열전이 없다. 흑치상지(黑齒常之) 열전에는 함형(咸亨)·상원(上元)연간, 다시 말해 670~676년의 기록이 없다. 더욱이 부여륭과 흑치상지의 묘지명에도 나당전쟁 기간의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의봉연간(儀鳳年間·676~678년) 토번의 침입이 거세지자 위원충(魏元忠)은 당 황제에게 대처 방안을 상주했다. 이때 위원충은 설인귀를 비판했다. '구당서' 위원충전에 "인귀자선력해동(仁貴自宣力海東), 공무척촌(功無尺寸), 금우불주(今又不誅), 종악갱심(縱惡更甚)"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를 해석하자면, "앞서 670년 설인귀는 토번과 치른 대비천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이후 사면돼 다시 나당전쟁에 나섰으나 전공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처벌받지 않고 악행만 점차 심해진다"는 뜻이다.


'금우불주'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설인귀가 상주로 유배된 시기는 상원연간이고 위원충이 설인귀를 비판한 시기는 의봉연간이다. 설인귀가 상원연간에 상주로 유배됐다면 위원충이 의봉연간에 설인귀가 아직 처벌되지 않았다고 비난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설인귀는 '상원연간 상주 유배형에 처해진 것'이지 실제로 유배된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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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소국에 패한 세계 제국 唐
지우고 싶은 사실, 의도적 누락
구체적 역사 기록 존재하지 앓아

설인귀는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안동도호(安東都護)로 안동도호부를 관장했다. 이어 670년 토번이 발호하자 나사도행군대총관(邏娑道行軍大摠管)으로 대비천 전투에 참가했다가 크게 패해 제명됐다. 다시 나당전쟁이 본격화하자 671년 계림도행군총관(鷄林道行軍摠管)으로 석성 전투에 투입됐다가 패해 당으로 귀국했다. 그는 673년 낙양에서 황제와 황후를 위해 불상 조성에 나섰다가 다시 나당전쟁에 투입됐다. 675년 천성 전투에 참가했다 패하고 다시 676년 기벌포 전투에 투입된 것이다.


상주 유배형에 처해지기 전까지 설인귀의 최종 직위는 '계림도총관'이었다. '신라 정벌', 즉 나당전쟁을 이끈 것이다. 설인귀가 상원연간 상주로 유배되는 형에 처해지게 한 '어떤 일'은 바로 675년 천성 전투와 676년 기벌포 전투의 패배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설인귀는 어떻게 연이은 패전에도 재기용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까. 설인귀는 당 태종 사망 후 우령군중랑장(右領軍中郞將)으로 황궁 숙위(宿衛)를 담당하고 있었다. 당 고종은 만년궁(萬年宮)에 머물렀다. 이때 갑자기 수해가 발생해 한밤중에 현무문(玄武門)으로 큰물이 들이닥쳤다. 숙위하던 자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그러나 설인귀는 황제가 위급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문 위로 올라가 크게 소리쳤다. 궁궐 내부에 물난리 소식이 알려져 황제는 급히 침실에서 나와 높은 곳으로 피신했다. 결국 황제의 침실까지 물이 차올랐다. 이 일로 당 고종은 설인귀를 깊이 신뢰하게 됐다.


당시 백제·고구려 멸망전에서 활약한 이적(李勣)이나 소정방(蘇定方) 같은 장수들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당 고종이 대규모 원정군에 동원할 수 있는 장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로써 설인귀에게 재기할 기회가 많이 주어진 것이다.


설인귀가 상주 유배형에 처해졌다가 복귀하자 당 고종은 그를 힐책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그때 만년궁에서 경(卿)이 아니었으면 나는 물고기가 되었을 것이오."


이상훈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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