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후반 건립된 안동 봉황사 대웅전은 보물 지정

용왕 선물로 쌓았다는 정암사 수마노탑 국보로 승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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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한 기념으로 세워진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旌善 淨巖寺 水瑪瑙塔)’이 국보로 승격됐다. 문화재청은 보물 제410호인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을 국보 제332호로 지정하고, 경북유형문화재인 ‘안동 봉황사 대웅전(安東 鳳凰寺 大雄殿)’을 보물 제2068호로 등록했다고 25일 밝혔다.


수마노탑이 세워진 정선 정암사는 자장율사가 당나라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진신사리를 받아 귀국해 643년(선덕여왕 12년)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진신사리란 석가모니 부처의 사리를 말한다. 이를 봉안하는 사찰은 통상 법당에 불상을 두지 않는다. 대신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법당인 적멸보궁을 마련한다. 정암사에도 수마노탑을 오르는 길목에 적멸보궁이 있다. 양산 통도사, 평창 오대산 중대, 영월 법흥사, 인제 봉정암에 있는 것들과 함께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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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마노탑은 적멸보궁 뒤편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야 만날 수 있다. 통상 탑은 본존불을 봉안한 건물인 금당(金堂) 앞에 배치된다. 하지만 수마노탑은 산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따로 조성됐다. 관계자는 “쇠퇴한 산천의 기운을 북돋운다는 ‘산천비보(山川裨補)’ 사상과 사리신앙의 영향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름에 들어간 글자 ‘마노’는 금, 은과 함께 7대 보석으로 꼽히는 마노(瑪瑙)를 가리킨다. 설화에 따르면 자장율사가 진신사리를 가지고 귀국할 때 서해 용왕이 그의 도력에 감화해 선물했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탑을 쌓았는데, 물길을 따라 가져왔다고 해서 앞글자에 ‘수(水)’를 붙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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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마노탑은 전탑을 모방한 모전(模塼) 석탑이다. 경주 분황사와 경북 영양군 입암면에 있는 탑과 같이 석재를 벽돌 모양으로 깎고 쌓아 올렸다. 화강암으로 기단(基壇)을 쌓고, 탑신부를 받치기 위해 두 단의 받침을 뒀다. 탑신(塔身)은 석회암층에서 산출되는 고회암으로 쌓았다. 회록색이 감도는 돌을 길이 30∼40㎝, 두께 5∼7㎝로 깎았다. 표면이 정교하게 정돈돼 벽돌을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관계자는 “조형적인 안정감과 입체감, 균형미를 잘 보여주고 있어 늦어도 고려시대 이전에 축조된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1층 몸돌의 남쪽 면에는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조성했다. 그 앞에 한 장의 돌을 세워 문비를 만들었다. 가운데에는 철로 만든 문고리를 달았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 수는 1층이 일곱 단이다. 한 단씩 줄어들어 7층은 한 단이다. 지붕돌 윗면은 1층이 아홉 단이다. 한 단씩 줄어들어 7층은 세 단이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청동 장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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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이 탑에서는 건립 이유와 수리 기록 등이 적힌 탑지석이 발견됐다. 그래서 수리기록, 연혁 등을 상세히 알 수 있다. 이 탑은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과 다보탑과 더불어 탑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지는 희소한 문화재이기도 하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모전석탑으로 조성된 진신사리 봉안탑이기도 해 역사는 물론 예술, 학술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평가된다.


보물로 지정된 ‘안동 봉황사 대웅전’은 17세기 후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큰 특징은 정면 다섯 칸에 얹은 팔작지붕. 조선 후기에 세 칸 맞배지붕 불전이 유행한 점을 고려하면 남다른 규모와 형식이다. 전면에서는 조선 후기에 드물었던 배흘림 기둥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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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단청은 근래 채색됐으나 내부 단청는 재건 당시 상태를 온전히 유지한다. 특히 정사각형 우물반자에 용과 금박으로 정교하게 그려진 연화당초문(연꽃과 넝쿨을 도안화한 무늬를 그린 단청 문양)과 전면 빗반자(경사 위에 세운 반자)에 새겨진 연꽃을 입에 물고 구름 사이를 노니는 봉황은 사찰의 유래와 관련한 독특한 표현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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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건물의 공포(지붕 하중을 받치기 위해 만든 구조물)를 비롯한 세부는 19세기 말 수리 흔적을 담고 있다. 공포는 전면과 옆면, 뒷면이 서로 달리하고 있다. 관계자는 “조선 말기에 어려웠던 안동 지역 불교계를 반영하는 형태”라고 설명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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