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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규홍의 나무와 사람] 탱크처럼…외세 침략 막아낸 탱자나무 성곽

최종수정 2020.06.03 14:04 기사입력 2020.06.03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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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실 임시 피난처된 강화도…급히 쌓은 토성 둘러싼 목책으로 활용
갑곶리·사기리 천연기념물 탱자나무…300년 가까운 세월 거치며 생존신고
남쪽 고향 떠나 찬바람 맞서 싸우며 우리나라서 가장 큰 탱자나무로 우뚝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 탱크처럼…외세 침략 막아낸 탱자나무 성곽

'참 이상한 나라'라는 짧은 영상이 눈길을 끌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에 대처하는 우리만의 방식을 홍보하는 영상이다. 자원봉사 인력의 헌신이 강조된 영상은 과하다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어려움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서는 우리 민족성은 개인주의가 발달한 서구인들에게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랜 침략과 극복의 역사를 살아온 우리에게는 별 일이 아니다.

미국의 철학자 존 듀이(1859~1952)는 '철학의 개조(1920)'에서 '기억'이야말로 사람과 동물을 구별하는 특징이라고 꼽았다. 동물의 경우 새로운 행동이나 고통을 과거와 연관짓지 못하지만 "인간은 사건이 일어나면 언제나 과거의 사건을 돌아보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외침을 자주 받아야 했던 유라시아 대륙 한 쪽 끄트머리에 자리잡은 우리 민족이 살아가는 방식은 스스로 떨쳐 일어나는 것이었다. 국난이 닥치면 장하게 이겨낸 과거 기억을 되새기며 다시 일어났다. 마침내 오랜 항쟁과 극복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민중의 기억으로 남았다. 그리고 기억은 민족 특유의 DNA가 돼 남다른 진화의 길을 거쳤다. 우리 안에 보존된 DNA는 이 땅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다른 생명체에도 전파됐다. 나무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 땅에는 고향도 천성도 모두 버리고 오로지 국가의 안위를 위해 살아온 나무가 있다.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기 위한 일념으로 살아온 나무다.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와 사기리 탱자나무가 바로 그것이다.

나무의 사연을 알아보려면 먼저 강화도의 역사, 특히 왕실의 피난처로 쓰인 질곡의 역사부터 짚어봐야 한다.


강화도가 임금의 피난처로 쓰인 건 몽골의 침입이 있었던 고려 때부터다. 왕실이 있는 개경에서 가깝다는 게 첫째 이유였고 침략자들이 뭍의 인해전술에 강하지만 해전(海戰)에는 약하다는 이유도 보태졌다.


1627년 정묘호란 때도 그랬다. 쇠퇴해가는 명나라와 대결 상태에 있었던 후금은 3만 대군을 이끌고 명나라와 가깝게 지내던 조선으로 쳐들어왔다. 당시 조선의 인조는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버리고 반금친명(反金親明) 기조를 유지했다.


조선의 방어선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평복으로 위장한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했다. 물론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피신 효과도 못 본 채 조선 왕실은 명나라 연호를 쓰지 않고 인질을 보내는 조건으로 치욕적인 화의에 나서 난이 마무리됐다.

400년의 긴 세월 동안 여전히 튼실한 탱자를 무성히 맺는 강화 사기리 탱자나무.

400년의 긴 세월 동안 여전히 튼실한 탱자를 무성히 맺는 강화 사기리 탱자나무.


9년 뒤인 1636년 청(淸)으로 이름을 바꾼 후금이 조선을 다시 침략했다. 병자호란이다. 피신에 급급했던 인조는 남한산성을 거쳐 강화도로 떠나려 했다. 하지만 눈 쌓인 산길을 이동하는 게 어려워 하릴없이 남한산성에 머물러야 했다. 결국 외적의 침입에 대항할 힘이 모자랐던 인조는 또 항복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더불어 왕자를 볼모로 내주고 말았다.


치욕의 기억을 잊지 못한 조선 왕실에 방책이 필요했다. 보장지(保障地·왕실의 임시 피난처)로 강화도에 여러 시설을 갖추려 한 건 그 때문이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 맺은 조약에 따르면 청의 허락 없이 성곽을 새로 지을 수 없었다. 애면글면하는 사이 청나라에 정치적 혼란이 벌어졌다. 조선은 그 틈에 강화도의 보장시설을 강화했다. 돈대(墩臺·성곽 시설의 하나로 망루와 포루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든 높직한 누대)를 시작으로 강화외성과 문수산성을 짓고 관리체계까지 확립했다. 숙종 때의 일이다.


그때 강화도에 급하게 흙으로 쌓아올린 성은 사철 내내 불어닥치는 강한 바닷바람을 이겨내지 못했다. 허물어지기 일쑤였던 것이다. 미래의 위기에 대비해 더 단단히 성을 보수해야 했다. 이때 기록에 탱자나무가 처음 등장한다.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영조 25년(1749년) 8월 20일치의 기록이 그것이다. '강화유수 원경하의 상서' 형식으로 적은 기록이다.


기록 가운데 "장맛비로 무너진 곳이 성의 절반을 넘어 가슴 아프다"는 대목이 있다. 성 보수에 많은 비용 들이지 않고도 장성(長城)을 만들 수 있는 계책이 있다는 대목도 보인다. 강화 지역민들로 하여금 나무를 열심히 심도록 하면 6~7년 안에 200리나 성처럼 쌓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제안이다.


그러면 "밖에는 아득한 바다가 자연스럽게 호참(濠塹ㆍ참호)을 이루고 있어 적을 방어하는 계책이 이것보다 좋은 곳은 없을 것이며, 연해의 토성(土性)도 탱자나무를 심기에 가장 적합하여 종종 진(鎭)·보(堡)가 밀림(密林)이 된 곳이 많습니다"라고 원경하는 썼다. 그는 "고려의 최영이 탐라국을 격파하지 못한 것은 그 가려진 지책(枳柵·탱자나무 목책) 때문"이라고 탱자나무 성곽의 효용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토성의 허술한 방호책을 강화하기 위해 떠오른 것이 탱자나무였다. 최영 장군의 탱자나무 목책을 기억한 것이다. 그러나 탱자나무는 강화도 지역에서 자라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탱자나무는 따뜻한 기후에서 자란다. 지금은 탱자나무가 강화도보다 북쪽에 있는 지역에서도 자라지만 1960년대만 해도 강화도는 탱자나무가 살 수 있는 북한계지(北限界地)였다.


하지만 조선 왕실은 원경하의 청을 받아들였다. 긴급히 영남에서 탱자나무를 가져와 심기로 결정했다. 탱자나무는 왕실을 지키기 위해 따뜻한 남녘 고향에서 벗어나 매운 바람 맞으며 나라 지키기에 출정했다. 천성을 떨치고 국난 극복에 나선 것이다.


위기에 대비해 추운 북녘으로 온 탱자나무는 시난고난 버텼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둘 죽었다. 그 많던 탱자나무 가운데 이제 두 그루만 남았다.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와 사기리 탱자나무가 그것이다. 두 탱자나무는 300년 가까운 세월을 거치면서 이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탱자나무가 돼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뿌리 부분에서부터 줄기가 여럿으로 갈라져 자란 갑곶리 탱자나무는 높이 4.2m, 뿌리 부분 둘레 2.1m로 탱자나무로서는 매우 큰 편이다. 나무는 한때 '강화역사관', 현재 '전쟁박물관'으로 불리는 기념관이 자리잡은 강화도 동편 해안가에 서 있다. 굴곡의 역사에 대한 또렷한 기억의 흔적으로 남은 갑곶돈대 곁의 언덕 한 켠이다. 나무가 서 있는 나지막한 비탈 언덕은 바닷바람 가림막으로 추위를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됐지 않았나 싶다.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는 긴 세월을 살아오며 줄기 곳곳에 상처가 남아있지만, 여전히 건강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는 긴 세월을 살아오며 줄기 곳곳에 상처가 남아있지만, 여전히 건강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강화 사기리 탱자나무의 서쪽으로 뻗은 굵은 줄기는 오래전 썩어 껍질만 남은 부분을 충전재로 메운 흔적이 뚜렷하다.

강화 사기리 탱자나무의 서쪽으로 뻗은 굵은 줄기는 오래전 썩어 껍질만 남은 부분을 충전재로 메운 흔적이 뚜렷하다.


사기리 탱자나무는 사정이 다르다. 들판에 홀로 서 있는 사기리 탱자나무는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겼다. 나무를 힘겹게 했던 건 찬 바람이다. 바닷바람으로부터 나무를 지켜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목숨은 겨우 이어갔지만 줄기의 상당 부분이 오래 전 썩어들었다. 사람들은 썩은 부분을 덜어내고 텅빈 공간을 충전재로 메워 보강했다. 그러나 나무의 생육 상태는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다.

외침의 기억을 오래 보존하려는 사람들의 간절한 노력에도 서쪽으로 뻗은 탱자나무의 가지는 완전히 죽고 말았다. 죽은 가지는 나무 바로 곁에 있는 큰 바위에 드러눕듯이 애처로운 형상으로 기대었고, 그나마 동쪽에서 곧게 자란 가지만 살아남았다.


한창 때 사기리 탱자나무는 높이나 뿌리 굵기 모두 갑곶리 탱자나무와 비슷했지만 오랜 우여곡절을 겪고 살아남은 지금의 모습은 그에 훨씬 못 미친다. 지금은 높이 3.6m 정도 된다. 최근 애처로이 살아남은 동쪽의 가지 곁에서 새 가지가 다시 살아나면서 옛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강화도의 두 그루 탱자나무는 고통의 생김새로 되살아나 간단없는 시련과 극복으로 이어온 우리 삶의 역사를 고스란히 기억하는 증거가 됐다. 고통의 기억으로 남은 탱자나무를 바라보는 건 잊힐지 모를 우리의 소중한 기억을 되살리고 우리가 사람으로서, 또 '참 이상한 나라'의 민족으로 더 오래 건강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얻는 길이 될 것이다.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천리포수목원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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