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집단 발병 사태는 국가의 역할이 가진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불신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신뢰다.
먼저 불신을 보자. 속도와 규모만 보면 한국은 2000년대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매우 빠른 속도와 성장세로 국가복지를 확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각자도생의 삶에 익숙하다. 산업화 시대 눈부신 경제성장에 비해 국가복지의 몫은 초라했고, 당시 각자도생의 단위는 가족이었다. 인공지능(AI) 시대의 문턱에 들어서 기업 성장이 고용 확대로 이어지지 않는 상황이고, 가족을 먹여살리는 남성 가장 모델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 지금 이 시점에서 각자도생 단위는 개인이다. 세계 어느 국가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초저출산 현상이 20년 가까이 지속되는 주 원인이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누군가를 만나 아이를 낳고 기르는 삶은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결정할 기획이 대상이 된 것이다.
코로나19는 이미 불안한 상황에서 각자 살아남기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또 다른 불확실성의 등장이었을 뿐이다. 국가가 뭘 하든 말든 일단 우리 모두는 마스크 뒤에 숨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마스크는 가격 자체가 그리 비싸지 않은 상품이었다. 그래서 초반 가격 폭등에도 불구하고 가계 파산으로 이어질 만큼 재난적 비용 수준은 아니었다. 마스크에 의지한 각자도생이 대다수에게 가능했던 것이다. 까짓(?) 감기 바이러스 수준이라며 코로나19를 우습게 여기고 국가 의료보장체계를 믿은 서유럽 사람들은 이제서야 마스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예전과 다른 국가의 모습을 보기 시작했다. 국민건강보험 기반 보건의료체계가 미국 같은 나라와는 비교도 안 되게 잘 작동하는 모습을 우리는 목도했다. 공무원들이 과로로 쓰러지는 상황에서도 헌신하는 장면을 봤다. 그리고 국가의 코로나19 사태 대응에 사사건건 정략적 반대만을 일삼던 야당은 4ㆍ15 총선에서 유권자의 혹독한 심판을 받았다. 바이러스가 주는 공포와 불안에 '나의 마스크'뿐 아니라 국가가 함께 대응해 주고 있다는 신뢰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공적(公的)' 마스크 개념까지 등장하지 않았나.
초저출산 20년과 함께 국가는 우리들의 신뢰 특히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서 여성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헛발질을 해왔다. "내가 돈 주는데 왜 낳지 않아?"라는 '투입-산출' 방식으로 저출산에 대응했다. 오죽하면 '정부야, 네가 아무리 나대봐라. 내가 결혼하나? 고양이랑 살지(2017년 2월27일 정부청사 앞 시위)'라는 여성들의 외침이 있었을까? 기초노령연금 액수를 올리면 노인 빈곤율은 투입한 돈의 양만큼 떨어진다. 그러나 출산장려금을 올린 만큼 아이울음 소리는 커지지 않는다. 아이 낳고 살 만큼 행복한 환경은 돈으로만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의 불확실성이 지배적 상황에서 저출산의 근본 원인과 책임은 나와 내 가족이 알아서 살라고 방치해온 국가에 있다. 초저출산 20년 동안 국가는 성차별을 외면해왔다. 그리고 출산장려금 올리면 그에 그대로 반응한 사람들이 아이를 낳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삶의 불안에 저출산이라는 마스크를 쓰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 마스크를 벗게 되는 출발점은 국가에 대한 신뢰 회복과 형성에 있다. 삶의 질 향상과 성평등 비전을 전제로 한 국가의 변신, 그 단초를 우리가 목격할 수 있을 때, 저출산이라는 문제도 비로소 해결의 출발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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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훈 서울여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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