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홍보 아낌없이 지원…한국영화 발전에 기여
'기생충' 아카데미 4관왕 숨은 주역

[사람人]디렉터 봉의 든든한 조력자...이미경 CJ그룹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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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CJ그룹은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을 닮았다. 식품 제조사로 출발해 미디어ㆍ엔터테인먼트로 사업을 넓혔다. 매캐한 냄새가 진동하던 극장을 갈아엎고 천편일률적으로 돌아가던 영화ㆍ음악ㆍ공연ㆍ방송 분야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능동적 변화를 이끈 주역은 이미경(62ㆍ영어명 미키 리) CJ그룹 부회장이다. 케이블방송 엠넷을 사들이고 국내 최초의 멀티플렉스인 CGV를 지었다.


그가 20년 이상 지속한 투자는 다양한 결실로 이어졌다. 가장 돋보이는 분야는 영화 투자ㆍ배급. 그가 책임 프로듀서(Executive Producer)로 이름을 올린 영화 '기생충'이 지난 9일(현지 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소재 돌비극장에서 열린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에서 4관왕까지 차지하면서 정점에 이르렀다. 그는 봉준호(51) 감독의 역량을 치켜세우기에 바빴다.

"나는 봉준호 감독의 모든 것을 좋아한다. 그의 미소, 머리 스타일, 그가 말하고 걷는 방식, 특히 그가 연출하는 방식을 좋아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그의 유머 감각이다. 그는 절대 심각해지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의 은인

이 부회장은 봉준호 감독과 터놓고 지낼 정도로 가깝다. CJ의 한 관계자는 "한국영화의 발전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봉 감독은 이 부회장의 지원 덕에 '살인의 추억(2003)', '마더(2009)', '설국열차(2013)' 등을 만들 수 있었다. 이 부회장을 만나기 전까지는 앞날이 불투명한 영화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첫 장편영화 '플란다스의 개(2000)'는 흥행에 참패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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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은 당시를 떠올리며 "'플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대학 시간강사 윤주(이성재 분)에게 내 마음이 투영돼 있더라"고 밝혔다. "매번 교수 추천에서 떨어진 그는 대학교수가 되냐 마냐 하는 갈림길에서 결국 돈을 싸들고 가서 대학교수가 된다. 이미 그때부터 내 마음은 그쪽으로 가 있었던 것 같다. 교수와 강사의 경계에서 윤주가 보여주는 그 현실적응 문제에, 당시 충무로 상업영화와 독립 장편 사이에서 갈등하던 나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투영돼 있다.“


봉준호 감독은 이 부회장과 차승재(60) 전 싸이더스 대표의 지지 아래 '살인의 추억'을 제작해 재기에 성공했다. '기생충'을 기획하면서 CJ ENM부터 찾아간 것은 이런 믿음 때문이었다. 이 부회장은 제작사인 바른손 E&A에 125억원을 투자했다.


비싼 수업료의 대가


작품의 질이 아무리 훌륭해도 마케팅ㆍ홍보가 부실하면 트로피를 품을 수 없다. 아카데미처럼 정치색 짙은 영화 행사는 더욱 그렇다. 투표권이 있는 아카데미 회원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개봉 극장 수를 늘려야 한다.


이 부회장은 5개월간 100억원 이상을 홍보 캠페인에 쏟아부었다. 지난해 넷플릭스가 영화 '로마' 홍보에 쓴 2500만달러(약 296억원)의 3분의 1 수준이다. 넷플릭스는 올해도 아카데미 캠페인에 1억달러 가까이 투입했다. 그러나 여우조연상('결혼 이야기'의 로라 던)과 장편 다큐멘터리상('아메리칸팩토리')을 받는 데 그쳤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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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회장은 글로벌 네트워크로 지원 사격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는 영화를 주력 사업으로 정하면서 해외 시장 진출까지 타진해 해외 주요 인사들과 친분이 두텁다. 삼성전자 미국 현지법인인 삼성아메리카에서 이사로 재직할 때는 스티븐 스필버그(74) 감독, 제작자 제프리 카젠버그(70) 등과 함께 다국적 엔터테인먼트 기업 드림웍스 설립도 주도했다. CJ가 드림웍스에 투자한 돈은 3억달러. 당시 CJ 그룹의 자산이 1조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모험'이었다.


카젠버그 드림웍스 최고경영자(CEO)는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 부회장에 대해 "돈과 야망, 무한한 지식의 샘을 갖고 할리우드로 온 인물"이라며 "드림웍스와 맺은 파트너십이 지렛대가 돼 한국과 미국에서 다른 목표를 추구했다"고 회고했다.


처음부터 일이 술술 풀렸던 것은 아니다. 이 부회장은 CJ엔터테인먼트가 태동하기 전 드라마 '모래시계'의 고(故) 김종학 프로듀서와 함께 영화사 제이콤을 공동 설립했다. 당시 제작한 '인샬라(1996)', '바리케이드(1997)' 모두 흥행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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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회장은 훗날 당시를 회고하며 봉준호 감독에게 "수업료를 많이 치렀다"며 "제이콤 때 겪었던 일들에 비하면 지금은 양반"이라고 들려줬다. 힘든 풍파를 헤치며 지금까지 버텨온 것에 대한 자부심의 피력은 아니었을까.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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