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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 사과를 파는 국도/박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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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은 말한다

얼음사과에서 꿀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 사과가 썩어 가는 흔적이라고


꽃도 바다도 썩어 가는 일과는 무관하게

훌쩍 내 곁을 떠나기도 하였는데

따뜻하게 기대 있었다면

더 빨리 썩었을 사과여

미안하다며 돌아보지 않는 입술이여


나는 돌아보지 않는 사과의 뒤통수를

영원히 바라보며

사라진 영원의 구멍을 채워 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사랑합니까?

아삭아삭 깨물어서 버리려고 있습니까?

트럭에서 굴러떨어지는 사과를 줍는 저녁

떠나려면 한쪽 부위 정도는 썩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해

그래야 시큼한 냄새 따위가 남는 거야

그것이 눈알이든 입술이든 심장이든 상관없이

아삭아삭 베어 먹고 달아나야 하니까


얼음과 얼음 사이에 끼어 있는 시간들

흠씬 두들겨 맞은 가을 국도를 지나


사과 박스를 포장하며

상인은 떨이 사과를 한 봉지 더 넣어 준다

사랑이라는 말이 검은 비닐봉지 속의 파과처럼 터진다


[오후 한 詩] 사과를 파는 국도/박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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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이 쓴 '진달래꽃'은 흔히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인 '한'을 읊은 시로 이별의 슬픔을 승화한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물론 이와 같은 표준적 풀이는 좀 냉정하게 말하자면 당시 국가를 대신할 민족의 창안과 이후 '한'이라는 공통 감각을 통한 국민의 육성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그보다 '진달래꽃'을 두고 과연 '승화'라는 말을 써도 될지 나는 여전히 망설여진다. 특히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이라는 구절은 읽을 때마다 뜨악하고 끔찍하다. 어쩌면 '진달래꽃'의 본심은 차라리 증오와 저주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어쨌든 우리가 "꿀이라 부르는 것"이 실은 "시큼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 가는 흔적"인 경우가 있다. 아픈 것은 다만 아플 뿐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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