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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가을귀]삼전도의 굴욕은 인조가 자초한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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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섭 작가 '왜란과 호란 사이 38년'
38년 전 임진왜란 겪고도 전쟁 대비하지 못한 조선 비판
"인조 곁에 반정공신 이유로 무능한 이들만…새로운 인재 안 찾아"

[이종길의 가을귀]삼전도의 굴욕은 인조가 자초한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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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살기 위해선 가지 못할 길이 없고….” “명길은 전하를 앞세우고 적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려는 자이옵니다.” “적의 아가리 속에도 분명 삶의 길은 있을 것이옵니다.” “삶과 죽음에도 아름다운 자리가 있을진대 하필 적의 아가리 속이겠나이까.”


영화 ‘남한산성(2017)’에서 최명길(이병헌)과 김상헌(김윤석)은 인조(박해일) 앞에서 대립각을 세운다. 청군을 피해 숨어든 남한산성은 고립무원. 청의 황제 홍타이지(김법래)는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라고 독촉한다. 인조는 공포에 질려 사색이 완연하다.

병자호란은 재앙으로 막을 내렸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머리를 땅바닥에 찧었고, 세자와 대군은 인질이 되어서 끌려갔다. 백성들도 노예로 딸려 가서 모진 고생을 했다. 불과 38년 전 임진왜란을 겪고도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결과였다.


조선은 청의 침략을 예측할 수 있었다. 청이 명의 요동 일대를 공격한 전쟁에 파병했기 때문이다. 1627년 청의 침략에 정묘화약도 맺었다. 청은 두만강 너머 지척에서 세력을 키웠다. 조선은 꾸준한 접촉으로 충분한 정보를 수집했다. 나름 군대를 증강했고 화약을 대량 생산했다. 일본으로부터 조총도 수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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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준비 대부분은 한양 인근과 강화도에 집중됐다. 최전선인 의주의 청북방어사 임경업 휘하 병력은 고작 8000명. 반면 호위청과 어영청, 훈련도감 소속 병력을 계속 충원한 한양의 병사는 1만명이 넘었다. 남한산성 역시 수어청 소속 병력이 1만2700명에 달했다.

전투를 할 수 있는 병력의 부족은 조선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조선이 임진왜란 동안 실질적으로 동원한 병력은 10만명도 안 된다. 전쟁이 끝나고 속오군제를 실행했으나 병력은 좀체 늘지 않았다. 속오군은 오늘날로 치면 향토예비군. 류성룡이 선조에게 건의해 도입됐다. 속오군 병력 대다수는 지방의 농민들로 평상시 농사 짓다가 겨울 농한기에 소집돼 훈련했다.


조선은 정묘호란 직후 속오군의 훈련과 통제를 위해 영장(營將) 제도를 도입했다. 나라 입장에서는 손쉽게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집당하는 입장에서는 겨울에도 쉬지 못하고 훈련해야 하는 어려움이 따랐다. 더욱이 훈련 참가 비용과 장비 모두 자비로 부담해야 했기에 농민들의 반발이 컸다. 머릿수 채우기에 급급해 공노비와 사노비가 합류되다보니 천한 것들과 함께 훈련할 수 없다는 불만도 잇따랐다.


조선은 호패법 실행으로 빈틈을 메울 수 있었다. 군역이 무서워 숨어 있는 인원을 찾아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패법은 광해군 때는 물론 인조 때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정묘호란 직전 시행된 호패제도는 민심을 달래자는 이유로 아예 폐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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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섭 작가의 ‘왜란과 호란 사이 38년’은 호패제도가 제대로 실행돼 충분한 병력을 얻었다 해도 오래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군량 부족이라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군인은 식량 생산 활동에 투입되지 않는다. 특정 장소에 대규모로 집결해 군사 활동을 한다. 이들을 훈련시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량 확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임진왜란을 겪은 류성룡도 ‘징비록’에서 군량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저자는 “군량 조달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한다. “생산은 물론이고 필요한 장소까지 운반하는 데 막대한 노동력과 시간이 든다. 이런 문제들은 국가의 재정이 튼튼해야만 해결 가능한데 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은 조선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조선 조정에서는 임시변통으로 공명첩을 발행해 군역을 면제시켜주거나 명예직인 관직을 주는 방식으로 식량을 모았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신분제를 흔들 뿐만 아니라 군역을 회피하는 수단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악영향을 끼쳤다.”


조선은 기득권층의 자발적인 희생과 헌신이 필요했다. 그러나 정묘호란 직전 시행된 호패제에서 향교 유생으로 등록된 4만명 가운데 2만7000명이 군역을 피하기 위해 정원 외로 등록한 사실이 드러났다. 대다수는 지방의 사대부로 온갖 방법을 써서 향교의 유생으로 등록했다. 이들이 외면한 군역은 공노비나 사노비처럼 평소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한 미천한 자들, 하루하루 먹고 살기 힘든 농민들에게 전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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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병자호란이 임진왜란보다 더 큰 재앙으로 이어진 배경에 이런 악순환이 있다고 지적한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났던 까닭은 지역에서 존경 받던 선비들이 사재를 털어서 의병을 일으키고 앞장서서 싸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의병도 보이지 않았고, 그들을 이끌 사대부도 보이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심해진 당파 싸움으로 인해 조정에서 외면당한 사대부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인조반정으로 인해 북인이 완전히 조정에서 밀려났는데 이들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소를 잡아 잔치를 열었을 정도였다.”


병자호란은 결국 국가로부터 아무 혜택이나 도움을 받지 못하고, 그럴 희망조차 사라져버렸서 벌어진 일이다. 이쯤 되면 조국이 아니라 ‘너희 나라’가 돼버릴 수밖에 없다.


임진왜란 때는 류성룡,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이 선조 곁에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했다. 그러나 인조의 곁에는 이귀, 김류, 김자점이 있었다. 몇 십 년 사이에 인재들이 갑자기 사라졌을 리는 만무하다. 인조가 인재들을 곁에 두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그나마 최명길이 눈에 띄지만, 주화파로 비난 받아 운신의 폭은 좁았다.


인사 문제의 책임은 전적으로 인조에게 있다. 그는 반정공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자격 없는 이들을 옆에 뒀다. 그들이 이괄의 난부터 정묘호란까지 보여준 무능함을 지켜보면서도 침묵했다. 직무 방기 또한 처벌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새로운 인재를 찾지 못한 것이 아니다. 찾지 않은 것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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