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윤재웅의 행인일기 58] '운명의 창' 앞에서

뉴스듣기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바티칸 대성당은 유럽 역사의 중심입니다. 예수의 제자 베드로의 무덤이 들어선 공동묘지 위에 세워졌지요. 바티카누스 평원이라 불리던 곳. 그 쓸쓸한 길가 한 모퉁이 허름한 언덕 묘지에 세워진 작은 교회가 바티칸 성당의 기원입니다. 성 베드로 성당이라고도 부르지요. 성당 안에 들어오면 베드로 성인의 무덤과 역대 교황의 묘를 비롯하여 찬란한 예술품들이 즐비합니다. '성 베드로 청동상' '발카디노' '피에타'…. 역사와 종교와 예술이 성스럽게 만나는 공간임을 확신하게 되지요.


성당 내부의 많은 예술품 중에 유독 눈을 사로잡는 게 있습니다. 중앙 제대를 사이에 놓고 큐폴라를 받치는 네 모서리 벽 한쪽에 서 있는 커다란 대리석상입니다. 창을 들고 서 있는 로마 병사의 조각상이지요. 롱기누스. 그는 로마의 군인으로서 십자가의 예수가 운명하자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예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릅니다. 예수의 몸에서 피가 쏟아져 내리지요. 창을 타고 흘러내리던 예수의 피가 그의 눈에 들어가자 심한 약시가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뒤로 군대를 떠나 깊은 신앙생활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되는 롱기누스. 예수는 자신의 주검에 창을 찌른 이에게도 사랑을 베풀어 감화시킨 걸까요? 예수의 운명을 확인하고 결정하는 창. 역사는 이 창을 '운명의 창'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운명의 창에 얽힌 이야기가 가슴 아프고 드라마틱해서 이 병사 앞에 오래 서 있습니다. 서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하는 골고다 언덕을 향해 시간의 터널을 날아가는 중이지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하늘의 도서관'에 있는 책을 대출해서 펼쳐 봅니다.


"2m가 넘는 무거운 십자가를 메고 가는 예수의 몸에 로마 병사가 채찍을 내리친다. 채찍 끝에 납이 붙어 있어서 한 번 칠 때마다 피부에 깊이 박혀 살점을 뜯어낸다. 채찍을 서른아홉 번이나 맞은 예수의 몸에 핏물 진물이 난다. 온몸이 타는 듯 화끈거린다. 무거운 나무 형틀을 메고 사형장으로 오르는 예수. 병사는 십자가를 바닥에 놓고 예수를 그 위에 차렷 자세로 옆으로 눕힌다. 두 발이 나란히 포개진 예수의 복사뼈 아래 큰 못을 박는다. 못은 두 발목을 관통해 형틀에 깊이 박힌다. 힘줄이 터지고 뼈가 부서진다. 병사는 예수의 몸이 하늘을 향하도록 다시 비틀어 형틀에 눕힌다. 가름대에 양팔을 끈으로 묶은 다음 살아 있는 사람의 손목뼈 사이에 또 못질을 한다. 십자가를 일으켜 세워 고정시킨다. 다리와 허리가 뒤틀린 예수. 채찍 맞은 온몸이 썩어 들어가듯 아프다. 못 박힌 발목과 손목의 신경이 터져 몸 전체로 치달려간다. 숨 쉴 때마다 밀려오는 극한의 고통.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좋으련만…. 십자가형은 가장 잔인한 형벌. 극심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게 만드는 죽음 지연의 고문이다. 조금이라도 배려할 수 있다면 빨리 죽게 하는 것. 정오부터 오후 세시까지 구름이 몰려오고 번개가 친다. 한 병사가 다가와 예수의 오른쪽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다. 예수의 몸에서 물과 피가 쏟아져 내린다. 뼈. 살. 피. 숨. 예수의 몸을 이루던 생명이 뿔뿔이 흩어진다. 곧이어 예수의 목이 꺾인다. 그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이 있고, 그 위의 나무판에는 '유대의 왕 예수'라 쓰여 있다."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창이 죽음 이전인가, 이후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저는 죽음을 도와준 창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처절한 고통을 당하는 이에 대한 마지막 배려가 당시 십자가형에 관행으로 있었다는군요. 몽둥이로 다리를 꺾어 부러뜨리는 겁니다. 그러면 횡경막이 치솟게 되어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한다고 합니다. 예수와 함께 좌우에 나란히 매달린 도둑들은 그렇게 죽었다는데, 예수는 '그의 뼈는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성서의 예언대로 죽음을 맞습니다. 로마 병사의 이 창을 왜 '운명의 창'이라 부르는지 짐작이 갑니다.

예수를 죽음에 이르게 한 롱기누스의 창은 '신성한 창'으로도 전승이 됩니다. 십자가형의 역설이지요. 지상에서 가장 처참한 방식으로 운명한 신의 아들. 가장 큰 고통과 함께하는 죽음만이 신성하다는 역설 앞에서 저는 쩔쩔맵니다. 극한의 고통과 싸우는 길이 왜 죽음밖에 없는지, 운명은 왜 가장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신성을 증명하는지 헤아리기 벅찹니다.


운명의 창. 신성의 창. 저는 지금 바티칸 성당에 흘러들어 이 역설의 창을 오래도록 느끼는 중입니다. 문득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선율이 들려옵니다. 아르페지오네. 활로 긋는 기타 모양의 첼로. 이 악기를 위해 만들어진 세기의 명곡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슬픔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표현하는 불가사의한 선율이지요. 슈베르트는 이 곡을 작곡하며 일기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가장 큰 슬픔이 세상을 기쁘게 합니다.' 놀라운 역설이 여기에도 있습니다. 인생 참 깊고도 빛납니다. 제 귀의 음악은 슬픔의 절정을 향해 가고, 운명의 창을 바라보는 눈시울은 점점 뜨거워집니다.   


문학평론가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포토] 12년만에 서울 버스파업 "웰컴 백 준호!"…손흥민, 태국전서 외친 말…역시 인성갑 "계속 울면서 고맙다더라"…박문성, '中 석방' 손준호와 통화 공개

    #국내이슈

  • 디즈니-플로리다 ‘게이언급금지법’ 소송 일단락 '아일 비 미싱 유' 부른 미국 래퍼, 초대형 성범죄 스캔들 '발칵' 美 볼티모어 교량과 '쾅'…해운사 머스크 배상책임은?

    #해외이슈

  • [이미지 다이어리] 누구나 길을 잃을 때가 있다 푸바오, 일주일 후 中 간다…에버랜드, 배웅시간 만들어 송파구 송파(석촌)호수 벚꽃축제 27일 개막

    #포토PICK

  • 기아, 생성형AI 탑재 준중형 세단 K4 세계 첫 공개 벤츠 G바겐 전기차 올해 나온다 제네시스, 네오룬 콘셉트 공개…초대형 SUV 시장 공략

    #CAR라이프

  • [뉴스속 용어]코코아 t당 1만 달러 넘자 '초코플레이션' 비상 [뉴스속 기업]트럼프가 만든 SNS ‘트루스 소셜’ [뉴스속 용어]건강 우려설 교황, '성지주일' 강론 생략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