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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요일에 읽는 전쟁사] 일제는 왜 그렇게 전쟁을 못했을까?

최종수정 2019.08.13 14:56 기사입력 2019.08.13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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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교육만 겨우 받고 온 병사들과 사서오경 읊다 온 장교들
전략, 전술의 총체적 부재 속 참패... 오늘날 기업들의 반면교사

1945년 9월2일, 미국 전함인 미주리호 선상에서 무조건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일본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외무대신의 모습(사진=위키피디아)

1945년 9월2일, 미국 전함인 미주리호 선상에서 무조건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일본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외무대신의 모습(사진=위키피디아)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일본군은 행동과 전술이 잡병수준이다. 단체로 모여서 돌격 밖에 할줄 모른다"


태평양전쟁의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인 과달카날 전투에서 미국 해병대 소속으로 무공훈장을 받았던 존 바실론(John Basilone) 중사는 일본군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 전투 뿐만 아니라 메이지유신 이후 일제가 벌였던 수많은 전투들 중 일본군이 잘싸웠다 평가받는 전투는 손에 꼽는다. 심지어 국공내전 중이던 중국군은 물론 우리 광복군과 전투에서도 일제는 물량공세 외에 제대로 전술적·전략적 승리를 거뒀다 평가받는 전투가 거의 없다.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한 제국주의 국가로서 일제는 아시아 태평양 각국을 침공했음에도, 제국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정말 전쟁을 못했던 국가로 손꼽힌다. 이미 메이지일본의 첫 대규모 대외전쟁이라 할 수 있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때부터 혹평이 시작됐다. 청일전쟁 때는 군량과 탄약조차 제대로 보급하지 않고 굶주리며 서울에서 평양까지 행군했다가 참패당할 뻔했고, 러일전쟁 때는 단순 포위 후 포격전으로 파괴할 수 있었던 뤼순 요새 하나를 점령하겠다며 6만여명을 착검돌격시켜 전원 사망케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일왕조차 군부 전략에 대해 질타할 정도로 그 수준이 매우 심각했다. 1941년 9월 진주만 공습을 앞두고 당시 육군원수였던 스기야마 하지메(杉山元)와 일왕 히로히토의 어전회의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당시 히로히토는 스기야마에게 "태평양 전선은 얼마 안에 정리할 수 있다 보는가?"라고 물었고, 이에 스기야마가 "도서지역이므로 3개월 정도 안에 정리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히로히토는 "중국도 1개월 안에 점령한다더니 벌써 4년째인데 태평양은 중국보다 더 넓지 않은가!"라고 호통을 쳤다 알려져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왕인 히로히토의 모습. 일왕 역시 진주만 공습 전 전략이 부재한 일본군의 작전에 대해 질타했으나 군부를 통제하지 못했으며, 일본은 승산이 전혀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뛰어들게 된다.(사진=연합뉴스)

태평양전쟁 당시 일왕인 히로히토의 모습. 일왕 역시 진주만 공습 전 전략이 부재한 일본군의 작전에 대해 질타했으나 군부를 통제하지 못했으며, 일본은 승산이 전혀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뛰어들게 된다.(사진=연합뉴스)



육군원수가 저 지경이니 일반 사병들의 수준은 볼 필요도 없었다. 이렇게 전술이나 전략적 사고가 전무했던 이유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대부분이 초등교육만 겨우 수료한 사람들로 구성된 탓이 컸다. 당시 일본은 4년제 소학교, 5년제 중등학교 체계를 구성하고 있었고, 소학교는 전 인구의 98%가 다녔지만 중등교육 30~40%, 고등교육은 5% 미만이었다. 특히 육군은 간단한 소총 사격이나 총검술 외에 중화기 교육조차 할 수 없는 문맹자들까지 징집해대서 더욱 상황이 심각했다. 이러다보니 장교들도 사병들과 함께 전장에서 특별한 작전을 고안하거나 활용할 방도가 없었다.

그나마 좋은 집안에 고등교육을 받았다는 귀족출신이 대부분인 장교들도 교육과정상의 문제로 인해 실전에 필요한 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다. 당시 일본의 육군사관학교나 해군학교 등 장교 육성 교육기관들은 교과과정에서 상명하복을 우선시하며 과거 메이지유신 이전의 도쿠가와 막부시절 사무라이들이나 배울법한 유교경전을 가르쳤으며, 정신력을 강조했다. 창의적인 전술·전략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환경이었던 셈이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뤼순요새 공략을 위해 병사들을 축차투입, 6만명이 넘는 전사자를 냈다. 어리석은 전략의 대명사로 여겨졌으나 태평양전쟁 때 똑같은 상황들이 반복된다.(사진=영화 '203고지' 장면 캡쳐)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뤼순요새 공략을 위해 병사들을 축차투입, 6만명이 넘는 전사자를 냈다. 어리석은 전략의 대명사로 여겨졌으나 태평양전쟁 때 똑같은 상황들이 반복된다.(사진=영화 '203고지' 장면 캡쳐)



장교와 사병간의 계급격차와 불통 또한 무능한 군대를 만든 독이었다. 1차대전으로 참전했던 귀족 대부분이 전사한 유럽과 달리 일본은 구 화족이 큰 피해없이 남아있었고, 이들은 아버지를 승계해 대부분 고위장교가 됐다. 귀족출신 장교들은 사병들과 대화 자체도 꺼렸으며 상명하복식 조직을 만들고 명령을 내리기만했다. 또한 상호 학연, 지연, 혈연들을 내세워 파벌을 만들면서 심각하게 반목했다.


결국 조직관리 및 건전한 조직문화 형성의 실패가 가장 무능한 군대를 낳은 셈이다. 이런 군 조직으로 이들보다 더 상황이 심각했던 아시아 주변 나라들의 군대와는 물량과 무기 기술력 등의 격차로 승리할 수 있었으나,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과의 전쟁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오늘날 이 과거 일본군의 조직관리 실패 사례는 전쟁사 뿐만 아니라 기업 경영관리에서도 반면교사의 사례로 많이 회자되고 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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