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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늘] 선을 넘는다는 것

최종수정 2019.06.07 07:31 기사입력 2019.06.07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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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부국장

허진석 부국장

놀라운 일의 시작은 언제나 놀라움이다. 1994년 4월 9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한국인 투수 박찬호 선수는 유서 깊은 다저스타디움의 경기장과 불펜을 가르는 경계를 넘어 역사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박 선수가 그 선을 넘기 전까지, 한국인들에게 메이저리그란 우주를 달리는 위성에 반사된 환상의 일부였다. 박찬호 선수가 다저스타디움의 마운드를 밟는 순간, 꿈은 현실이 되었다. 수많은 한국인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서, 또는 메이저리그를 꿈꾸며 땀을 흘린다.


1998년 7월 7일 위스콘신 주 블랙울프런 골프장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US여자오픈 연장전 18번홀. 한국의 여성 골퍼 박세리 선수가 친 드라이브샷이 왼쪽으로 날아가 연못 쪽으로 굴러 들어갔다. 공은 다행히 물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경사가 심한 잡초에 묻혀있었다. 박세리 선수는 신발과 양말을 벗고 종아리까지 잠기는 물에 들어가서 공을 빼냈다. 분이 부시도록 흰 박세리 선수의 맨발과 절묘한 위기 탈출. 이 장면은 박 선수의 우승을 결정짓는 퍼트보다 더 선명하게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았다.


1988년 구옥희 선수가 '탠더드 레지스터 대회'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LPGA의 타이틀을 차지했지만 우리는 그 가치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 박세리 선수가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할 때, 한국의 여자 골프도 금단처럼 여겼던 선을 넘었다. 미국의 골프장은 더 이상 전설들이 유영하는 환상의 공간이 아니었다. 한국의 여성 골퍼 박세리 선수가 지배하는 공간, 한 세대가 지난 뒤에는 '세리 키즈'가 주름잡는 생태계가 되었다. 우리에게 선(線)이란, 선을 넘는다는 일이란 무슨 의미인가.


'선이라는 건 딱 거기까지라는 뜻이다. 선을 지킨다는 건 지금껏 머물던 익숙함의 영역, 딱 거기까지의 세상과 규칙과 관계들을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그건 결국 선을 넘지 않는다면, 결코 다른 세상과 규칙과 관계는 만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새로운 관계를 꿈꾼다면, 사랑을 꿈꾼다면, 선을 넘어야만 한다. 선을 지키는 한, 그와 당신은 딱 거기까지일 수밖에 없다.' (텔레비전 드라마 '응답하라 1988 9화 - 선을 넘는다는 것)


2007년 오늘, 박세리 선수는 선을 하나 더 넘었다. LPGA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것이다. 아시아인으로는 최초였다. 그는 2004년에 미켈롭울트라 오픈에서 우승, 명예의 전당 가입에 필요한 점수(27점)를 모두 얻었다. 이날 메릴랜드 주 하브드그레이스 불록 골프코스에서 열린 맥도널드 챔피언십 1라운드를 마쳐 열 시즌 현역 활동이라는 또 하나의 조건을 충족했다. 이제 명예의 전당은 더 이상 전설의 일부가 아니었다. 한국 골프 선수들의 인생에서 이정표이자 목표가 되었다.

수많은 세리 키즈 중에서도 우등생으로 꼽히는 김세영 선수는 지난 5월 6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데일리시티 레이크머세드 골프클럽에서 막을 내린 메디힐 챔피언십에서 연장 끝에 우승하면서 시즌 첫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김 선수는 기자들 앞에서 "내 목표는 우승을 차곡차곡 쌓아 골프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라고 했다. 놀라운 일이다. 어두운 밤에 아무도 모르게, 또는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선 하나를 넘어도 세상은 당신이 그 선을 넘기 전과 같지 않다. 그리고 선을 넘기 전으로 절대 돌아갈 수 없다.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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