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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섬, 잎, 꿈, 밀물, 썰물, 고래, 돌/박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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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사람입니다. 섬입니다. 잎입니다. 꿈과 보름달 사이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무거운 소리입니다. 코발트블루와 버밀리온 사이에서 나온 높은 소리입니다.

커다란 창문 앞에 앉아야 한다고, 꿈과 보름달 사이에서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나도 신발을 신었습니다. 두 발로 걸었습니다.


섬과 잎 사이, 앞사람과 뒷사람 사이, 고등어 같은 사람과 홍당무 같은 사람 사이로 바닷물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나는 섬입니다. 바닷물이 가슴까지, 턱밑까지 올라온 밀물의 섬입니다. 축축한 발목이 드러난 썰물의 섬입니다.

나는 잎입니다. 돌의 잎, 물의 잎, 고래의 잎입니다. 잎이 자랍니다. 한낮의 섬이 내 안에서 뛰다가, 한밤의 섬이 나를 피해 걷다가


내 허리에서 잎으로 돋은, 코발트블루와 버밀리온 사이에서 나온, 꿈과 보름달 사이에서 떨어진 소리입니다.


2


그래도 나는 사람입니다. 딱딱하게 마른 콩 같은, 조약돌 같은 사람입니다. 내 안에서 소리가 납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작은 돌들이 어쩌다가 마구 떨어지는 소리가 납니다.


그래도 나는 잎이 돋아나는 사람입니다. 한낮의 섬이 달려가는, 한밤의 섬이 언뜻언뜻 보이는 그런 사람입니다. 섬, 잎, 꿈, 달, 창문, 신발, 두 발, 허리, 가슴, 밀물, 썰물, 고래, 콩, 돌까지도 다 있는 사람입니다. 앞사람은 여전히 앞에서 가고, 뒷사람은 매일 뒤에서 옵니다.


잎이 너무 많이 자라서 허리가 조금씩 휩니다. 꿈과 보름달 사이에서 돌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납니다. 어젯밤 나를 끌어안다가 발목이 부러진 코발트블루와 온종일 햇빛 때문에 어지러운 버밀리온 사이에서 여름이, 가을이 끝나는 소리가 납니다. 그래도 나는 매일 사람입니다.






■참 알쏭달쏭한 시다. "그래도 나는 사람입니다"라니, 대체 무슨 말일까? 내 나름대로 꼽아 본 이 시의 중요한 화소들은 앞에 옮겨 적은 문장과 "그래도 나는 잎이 돋아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섬, 잎, 꿈, 달, 창문, (중략) 밀물, 썰물, 고래, 콩, 돌까지도 다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나는 매일 사람입니다"이다. 이처럼 좀 좁혀 놓고 여러 번 다시 읽어 보니 "그래도"라는 단어의 맥락이 문득 별자리의 별들처럼 반짝이기 시작한다. 이렇게 말이다. 시인은 자신을 "섬, 잎, 꿈, 밀물, 썰물, 고래, 돌"이라고 꿈꾼다. 그러나 시인은 "그래도" 자신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한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스스로를 "잎이 돋아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여름이, 가을이 끝나는 소리가" 나도, "그래도" 시인은 '매일매일' 꿈꾸는 "사람"이고자 한다. 아름답지 않은가. 꿈꾸는 자가 아름답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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