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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굽는 타자기]당신의 침묵은 타인의 그것과 다르다

최종수정 2020.02.03 13:29 기사입력 2019.03.08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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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침묵

자기만의 침묵

[아시아경제 김지희 기자] "이 세계에 있으면서 동시에 있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수평선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에 마음을 빼앗길 때, 혹은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초록색 이끼가 낀 바위만 보면서 거기서 눈을 떼지 못할 때, 또는 그저 아이를 내 품에 안고 있는 그런 짧은 순간들이 나에겐 최고의 순간이다."


특별할 것 없는 경험이다. 지금 당장에라도 마주할 수 있을 법한 순간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같은 경험을 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세계는 온전히 차단되고 내면에 평온함이 찾아오는, 저 특별한 순간의 의미를 유창하게 풀어낸 책이 나왔다.


우선 저자의 이력부터 눈길을 끈다. 책을 쓴 이는 노르웨이 탐험가 엘링 카게. 1993년 사상 최초로 혼자 걸어서 남극에 도착했으며, 1994년에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세계 최초로 남극점, 북극점,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인물이다. 저자의 이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탐험가인 동시에 변호사이자 최고경영자(CEO)이며 세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누구보다 소란스러운 일상을 살았을 법한, 그래서 오히려 치열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조언할 것만 같은 이력의 저자가 '침묵'을 말한다. 그러나 고요함이나 평온함과는 거리가 먼 저자의 경험이 아이러니하게도 책에서 주장하는 침묵의 의미에 설득력을 불어넣는다.


저자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책에서 주장하는 침묵이 무엇인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책은 침묵의 반대편에 '소음'이라는 개념을 둔다. 직관적으로 접근하면 시청각적 의미에서의 고요함쯤이 될 테지만 여기서의 침묵은 좀 더 포괄적이다. 정보의 과잉, 과잉 연결의 시대에 내면에 집중한다는 의미다. 현대인들에게 진정 필요한 건 '자기만의 방'이 아니라 '자기만의 침묵'이라는 게 저자의 메시지다.


저자의 남다른 경험들이 잔잔한 침묵의 이야기에 생동감을 입힌다. 남극 대륙을 끝없이 걷던 그가 거대한 얼음 위에서 침묵을 '듣고 느낀' 일화만 봐도 그렇다. "눈 위의 지표면은 희미하게 푸른빛이 감돌면서 약간 불그스름하기도 하고 녹색을 띠면서 살짝 분홍빛도 섞여 있었다. 나는 길이 바뀔 때마다 자연도 변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다. 내 주변 환경은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변한 것은 나였다. 여기 남극에 와서 아주 작은 즐거움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저자의 경험을 통해서만 침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 음악,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명사들이 어떻게 침묵을 정의하며 자신만의 침묵을 이끌어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ㆍ비트겐슈타인ㆍ존 케이지ㆍ뭉크 등이 추구한 침묵을 통해 관념으로서의 침묵을 독자의 일상생활로 끌어온다. 다만 명사의 사례를 활용한 여타 저서들과 달리, 이 책은 권위적이지 않다. 책에서 제시한 침묵의 사례가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당신이 경험하는 침묵은 다른 사람이 경험하는 침묵과 다르다는 것을 명심하라.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침묵이 있다."


본문 중간중간 담긴 사진들을 살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저자가 극지를 탐험하면서 느낀 고독이 제법 잘 전달된다. 세련되기보다는 다소 투박함이 느껴지는 사진들이지만 사진의 담담함이 책의 운치를 더해주는 것도 매력이다.


"우리는 샴페인 잔을 손에 들고서 왔다가 가버린 세월에 대해 그럴싸한 말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스물한 번째 생일을 맞이한 날에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다음과 같은 조언에 귀 기울여야 한다. '사용법을 안다면 인생은 길다.'"


<자기만의 침묵, 엘링 카게 지음, 김민수 옮김, 민음사, 1만3000원>




김지희 기자 way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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