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한정호의 라이브 리뷰]2010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 율리아나 아브제예바

뉴스듣기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한정호 객원기자

한정호 객원기자

원본보기 아이콘

5년 마다 열리는 쇼팽 콩쿠르는 피아노 연주자들의 경연장일 뿐 아니라 악기 메이커들의 각축장이다. 스타인웨이, 야마하, 가와이처럼 유명 피아노 브랜드들은 각사의 엘리트 테크니션들이 완성한 최신 악기를 폴란드 바르샤바까지 들여오는 과정부터 심혈을 기울이고, 숨 가쁜 경쟁이 시작된다. 현지 기후와 홀 상태에 따른 습도 조절부터 경연 레퍼토리에 따른 부품 선택, 유력 후보의 과거 선호를 파악한 컨설턴트의 조언에 따라 콩쿠르에 올릴 피아노를 준비한다. 참가자들이 10분 내외의 짧은 시간 동안, 대회에 사용할 악기를 고르는 순간마저 또 하나의 관문이 됐다. 마치 명차 브랜드들이 F1 그랑프리 피트에서 격돌하는 양상이다.


2010년 대회에서 구소련 출신 율리아나 아브제예바가 우승하자 언론은 마르타 아르헤리치 이후 45년 만에 탄생한 여성 참가자로 조명했지만, 현역 피아니스트들은 쇼팽의 현재적 가치를 탐구하는 데 야마하로 성공한 아브제예바의 접근 형태에 주목했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지만 명 피아니스트는 악기를 가린다. 아브제예바는 야마하로 쇼팽 경연을 우승한 첫 사례다.

쇼팽 우승 이후 한동안 야마하를 고수하던 아브제예바는 요즘 들어 거의 모든 공연에서 스타인웨이를 고른다. 자연스러운 해석의 변화도 유추할 단서다. 7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쾰른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9번,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협연할 때도 공연장이 보유한 복수의 스타인웨이 중에서 자신의 병기를 선택한다. 본인의 구상을 해당 피아노가 정확히 구현하는지, 악기의 울림이 어떻게 객석에 전달되는지, 과거 같은 홀에서 저명 피아니스트가 고른 기종은 무엇인지 세심히 확인하는 절차가 투어 연주자로 세계를 순회할 때 반복되는 루틴이다.


1985년 모스크바 태생의 아브제예바는 과거 쇼팽 콩쿠르 우승자들이 걸었던 상업적틀 외곽에 있다. 마우리치오 폴리니(1960), 마르타 아르헤리치(1965), 크리스티안 지메르만(1975)부터 윤디 리(2000), 라파우 블레하치(2005), 조성진(2015)처럼 쇼팽의 패자는 으레 도이치 그라모폰(DG) 레이블과 계약을 맺었지만, 아브제예바는 마이너 레이블 미라레(Mirare)에서 세 장의 신보를 내놓았다. 과거 두 차례의 내한 독주회 매표 양상이나 세계적 추세를 보면, 아브제예바는 여전히 청중보다 피아니스트들이 더 호기심을 갖고 지켜보는 예술가다. 베를린 필하모닉 협연, 카네기홀 기획 공연 유무로 쇼팽 입상자들 시이에 우열을 가리는 소비자들의 틈바구니에서 벗어나, 본인의 호흡과 속도대로 나이 대에 맞는 레퍼토리를 침착히 조망한다.


율리아나 아브제예바 (C) Mirare

율리아나 아브제예바 (C) Mirare

원본보기 아이콘


아브제예바의 공연을 보면 깨끗한 음색으로 핵심을 선명하게 울리면서도, 공연장 안에서 포근함을 전하는 특유의 느낌이 짙다. 정진으로 가다듬은 테크닉에 전체를 조망하는 지성이 결합한 형태다. 작은 체구지만 막강한 울림을 요구하는 러시아 작품에서도 오케스트라에 밀리지 않는 특유의 방법론이 체화됐다. 취미로 즐기는 체스에서 앞에 수를 미리 내다보듯이, 작품 전반을 전향적으로 조망하는 시야가 상쾌하면서 탁 트인 연주의 원동력이다.

특히 리스트 시대 발달한 모던 피아노 이전 시절의 바로크와 고전주의 작품에서, 아브제예바는 어린 시절부터 익힌 쳄발로의 이해를 현대 악기에 전이하는 독창성이 두드러진다. 여느 쇼팽 우승자와는 동 떨어진 방식이지만 바흐 영국 모음곡에서 보이는 매끄러운 장식음이나 강약의 조절, 에코의 표현을 보면, 쳄발로식 셈여림의 현대적 재현 이상의 음악적 대화를 추구한다.


또한 습작부터 노작까지 쇼팽이 일생에 걸쳐 남긴 다양한 스펨트럼에서 직관적으로 각각의 음영에 어울리는 사운드를 찾아내는 능력은 쇼팽 연구의 귀중한 모범이다. 24개 전주곡에서 보이듯 청자가 제각각 상상할 수 있도록 자유의 문을 열어주는 역할이다. 다만 계산된 위트와 낭만처럼 보일 구석을 세세히 지워가는 인상은 되돌아볼 과제다. 흐느끼지만 뒷맛이 개운한 쇼팽 접근에 오늘날의 청중이 호응하는 현상도 곱씹어볼만한 하다.


율리아나 아브제예바 (C) C_Schneider

율리아나 아브제예바 (C) C_Schneider

원본보기 아이콘

쇼팽 우승자를 발표하는 순간 주인공의 반응은 평소 연주자의 품성을 드러내는 유력한 증거였다. 2000년 윤디 리는 목마를 탔고, 2005년 라파우 블레하치는 모친의 품에 안겨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2015년 조성진은 씩 웃는 미소로 차분히 주위를 살폈다. 2010년 아브제예바는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침착하게 언론사의 질문 공세에 응했다. “콩쿠르는 많은 변화를 주겠지만 내 자신이 크게 바뀌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답변은 시종 일관 차가운 시선으로 쇼팽에 집중하던 눈길이 본인을 향한 것이다.


“현재의 쇼팽은 폴란드 출신의 정통성 안에서 안주하지 않겠다”는 심사위원들의 집단의지가 2020년 대회에도 이어질지는 의문이다. 다만 파데레프스키 버전을 비롯해 폴란드 정부가 오랜 시간을 기울여 발굴, 복원한 쇼팽의 원전 악보를 마주하는 새로운 세대들이라면, 오늘을 사는 연주가의 사명이 무엇인지, 아브제예바처럼 자문자답할 줄 알아야 한다. 단순히 기존 유명 쇼팽 입상자들의 참고 해석에 따라, 귀에 익숙한 소리를 들려줘선 ‘미래의 쇼팽’을 예견할 수 없다. 쇼팽 경연의 중대 고비인 환상 폴로네이즈에서 폴란드 내셔널 버전이 새롭게 예시하는 아티큘레이션과 스타카토, 레가토와 슬러는 모두 기존 버전과 다르고, 그에 따라 속도와 해석에 변화를 줘야 한다.


불협화음처럼 들려서 잘못 치고 있는 게 아닐까 고민할 때, 그것이 쇼팽이 쓴 소리의 본질이라고 아브제예바는 본인의 답을 내놓았다. 음악적 재료와 구성에서 신세계를 펼쳤지만 작품을 파고 들어가면 갈수록 결국 인간의 얼굴을 한 쇼팽이 드러난다는 면에서 쇼팽 콩쿠르는 스타 탄생의 장 이상이다. 음악은 경쟁이 아니지만 경연이 결국 텍스트를 건강하게 만드는 순기능이 있음을 아브제예바와 쇼팽 콩쿠르는 증명한다.


한정호 객원기자ㆍ에투알클래식&컨설팅 대표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6년 만에 솔로 데뷔…(여자)아이들 우기, 앨범 선주문 50만장 "편파방송으로 명예훼손" 어트랙트, SBS '그알' 제작진 고소 강릉 해안도로에 정체모를 빨간색 외제차…"여기서 사진 찍으라고?"

    #국내이슈

  • 美대학 ‘친팔 시위’ 격화…네타냐후 “반유대주의 폭동” "죽음이 아니라 자유 위한 것"…전신마비 변호사 페루서 첫 안락사 "푸바오 잘 지내요" 영상 또 공개…공식 데뷔 빨라지나

    #해외이슈

  • [포토] 정교한 3D 프린팅의 세계 [포토] '그날의 기억' [이미지 다이어리] 그곳에 목련이 필 줄 알았다.

    #포토PICK

  • 신형 GV70 내달 출시…부분변경 디자인 공개 제네시스, 中서 '고성능 G80 EV 콘셉트카' 세계 최초 공개 "쓰임새는 고객이 정한다" 현대차가 제시하는 미래 상용차 미리보니

    #CAR라이프

  • [뉴스속 인물]하이브에 반기 든 '뉴진스의 엄마' 민희진 [뉴스속 용어]뉴스페이스 신호탄, '초소형 군집위성' [뉴스속 용어]日 정치인 '야스쿠니신사' 집단 참배…한·중 항의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