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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 詩]풀리다/이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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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올랐다가

산에서 내려오는 길이었다


불공을 드리러 산사에 온 듯한 할머니

내려가는 길이 위태롭다

하여 나란히 보폭을 맞춘다

할머니가 쉬면 나도 쉬고

나무도 쉰다

할머니가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나도 내리막길을 뒤따라 내려가고

계곡물도 내려간다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쉬던 할머니가

갑자기 나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한다

아무 말 없던 분이, 첫마디가 그랬다


나는 무엇으로 찍어 드려야 하나 망설이다

휴대전화를 달라고 말하지만

그런 게 없다고 하신다

옷매무새를 만진 할머니가 자세를 정하고

내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어 드린다

사진, 어떻게 전달해 드릴까요… 아드님 전화번호 알려 주시면 그리로 보내 드릴게요


찍었으면. 됐다.


그만 그 소리에 무릎뼈를 저 위에 두고 온 사람처럼 풀린다, 풀린다, 풀린다





■시쳇말로 하자면 참 쿨한 할머니다. 할머니 말씀대로 "찍었으면" 됐지 굳이 그 사진을 가져 무엇하겠는가.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생이 다만 경외스러울 따름이다. 더구나 그러함에도 매사에 정성을 다하는 단정함이라니("옷매무새를 만진 할머니가 자세를 정하고"), "그만 그 소리에 무릎뼈를 저 위에 두고 온 사람처럼" 풀릴 만도 하겠다 싶다. 이 시를 읽고 새삼 배운 바를 적자면 시인은 '말씀'을 흘려듣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이 세상 곳곳에 흘러넘치는 '말'을 '말씀'으로 공경하고 귀화시킬 줄 아는 사람이 진짜 시인이라는 사실이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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