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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 건드리는 연극 '레드'

최종수정 2019.02.09 17:46 기사입력 2019.02.09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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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추상표현주의 화가 '로스코'와 가상인물 조수 '켄'의 2인극
로스코의 미술에 대한 철학·사유 통해 치열했던 그의 삶 조명

[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니체 읽어봤어? 비극의 탄생? 프로이드는 읽어봤겠지? 융은? 바이런은? 워즈워드는? 아이스퀼로스? 뚜르게네프? 소포클레스? 쇼펜하우어? 셰익스피어? 햄릿은? 제발 최소한 햄릿만큼이라도?"


연극 '레드'는 1950년대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와 가상인물인 조수 켄을 내세운 2인극이다. 극은 로스코와 켄의 첫 만남으로부터 시작한다. 로스코는 니체를 언급하며 다짜고짜 켄을 몰아세운다. 켄은 그림을 배우기 위해 이제 막 로스코의 작업실에 첫 발을 들였을 뿐이다. 로스코가 언급한 이들을 알 리 없다. 켄은 첫 만남에서부터 니체도 모르고 예술을 하겠다는 한심한 녀석이 되고 만다.

레드는 자존심을 건드리는 연극이다. 로스코는 켄과 대화에서 자신의 지적 수준을 과시하듯 어려운 용어들을 쏟아낸다. 관객들은 로스코의 대사를 따라가다 여러 차례 벽에 부딪히는 경험을 한다. 어려운 연극이다.


쉽게 생각하면 로스코는 권위를 앞세우고 다른 사람들을 모두 무시하는 '꼰대'의 전형이다. 로스코가 켄이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선그어 주는 장면에서 그의 성격이 드러난다. "물감을 섞고 붓을 빨고 그림을 옮기는 걸 돕는 거야. 넌 내 식사와 담배 심부름이나 하면서, 내 변덕을 다 받아줘야 해." 한 마디 덧붙인다. "그게 그림을 그리는건 아니야."


한편으로 대부분 극에서 묘사되는 꼰대들처럼 로스코는 연민의 정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러러 볼 수 있게 자신의 성을 높이 쌓아올리지만 그래서 결국에는 스스로 성에 고립되고 마는 인물이다.

연극 '레드'의 한 장면  [사진= 신시컴퍼니 제공]

연극 '레드'의 한 장면 [사진= 신시컴퍼니 제공]


실제 로스코는 왜 자신만의 성을 쌓고자 했을지 이해가 되는 치열한 삶을 살았다. 로스코는 1903년 9월 마르쿠스 로트코비치라는 이름으로 러시아의 드빈스크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당시 러시아는 제정 말기로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다. 혼동 속에 반유대주의가 팽배했다. 로스코가 태어나기 5개월 전 키시뇨프에서 참혹한 유대인 학살이 있었다. 로스코의 아버지는 러시아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1910년 로스코의 아버지와 두 형이 먼저 미국으로 건너갔다. 로스코는 어머니, 누나와 함께 1913년 6월 미국으로 건너간다. 당시 러시아에서 미국까지 배를 타고 약 2개월이 걸리는 먼 여정이었다. 10살 로스코에게 그 기억은 어떻게 남았을까.

로스코의 가족이 3년 만에 미국에서 모였지만 기쁨은 오래 가지 못한다. 로스코가 미국에 도착하고 6개월이 지난 1914년 3월 로스코의 아버지가 대장암으로 숨을 거둔다. 로스코 가족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린다. 로스코는 미국에 도착했을 당시 영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어린 그는 낯선 이국 땅에서 살아남고자 치열하게 공부했다.


극에서 로스코가 어려운 용어들을 사용하며 나누는 대화는 10대 때 생존을 위한 공부의 결과다. 로스코는 예일대 문학부에 장학생으로 입학한다. 하지만 당시 미국에도 반유대주의가 확산됐고 돌연 장학금이 취소되면서 로스코는 예일대를 중퇴한다. 로스코는 예일대를 그만둔 뒤 잠깐 연극을 배웠고 이내 그림에 빠져든다. 그에게 그림은 마지막 버팀목이었다. 그래서 쉽사리 타협하지 않았고 독특한 작품 세계를 만들어냈다.


로스코의 삶은 두 차례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관통한다. 혼돈. 당시 예술가들은 문명의 발전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로스코는 1958년 거대 주류업체 시그램으로부터 벽화 작품 의뢰를 받고 고민에 빠진다. 시그램은 뉴욕에 새로 지을 본사 건물에 입점할 포시즌 레스토랑을 장식할 벽화를 로스코에게 의뢰했다. 시그램 본사의 고급 레스토랑 포시즌은 당시 예술가들이 배척하고자 했던 자본주의의 상징 같은 장소였다.

연극 '레드'의 한 장면  [사진= 신시컴퍼니 제공]

연극 '레드'의 한 장면 [사진= 신시컴퍼니 제공]


멕시코 화가 디에고 리베라에게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리베라는 1934년 '석유왕' 존 데이비슨 록펠러로부터 록펠러센터의 로비를 장식할 대형 벽화를 의뢰받았다. 리베라는 노동자와 레닌의 그림을 그려 록펠러를 조롱했다. 록펠러는 분노해 벽화를 부숴버렸다.


로스코도 포시즌 레스토랑을 화려하게 만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로스코는 돈을 챙기면서 리베라처럼 구역질 나는 그림을 그려 포시즌 레스토랑을 망치고 싶어 했다. 결국 극에서처럼 그림을 포기하고 선금으로 받은 막대한 돈도 돌려준다.


극은 로스코가 켄을 인정하면서 끝난다. 켄을 통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신의 성을 쌓으며 살아온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로스코는 1970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로스코는 관객들이 그림을 해석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에서 자신의 추상 작품에 제목을 달지 않았는데 그가 자살하던 해에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에도 역시 제목을 달지 않았다. 로스코가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은 선명한 붉은색으로 가득 채워졌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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