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웅의 행인일기 29]몽마르트르 언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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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거대한 분지입니다. 오르막 내리막이 거의 없죠. 다리 튼튼하고 시간만 있으면 걸어 다닐 만합니다. 몽마르트르는 파리 분지 가운데서도 불룩하게 솟은 언덕. 여기에 오르면 시내 전역이 시원하게 보이고, 밤에는 멋진 야경을 체험할 수 있죠. 밤하늘의 별들이 지상에 내려와서 소곤거리는 듯, 수많은 불빛들이 눈을 반짝입니다. 파리에 살고 있는 조카가 야경 전망이 좋은 쪽으로 안내하며 말합니다. "서울의 남산 같은 곳이에요. 저기 에펠탑 보이시죠? 밤에는 한 시간에 한 번씩 조명 쇼를 해요."


예술가의 거리 몽마르트르 언덕. 가난한 화가들이 그림 팔러 오는 곳. 생전에 작품 한 점 팔지 못했던 빈센트 반 고흐의 몽마르트르 체류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나마 동생 테오가 형 몰래 한 점 사주죠. 형제의 편지를 모아놓은 책을 보면,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지. 네가 보내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코끝이 찡하군요. 형의 평생을 후원하던 동생이 중병에 걸리자 빈센트는 자기 생을 먼저 마감합니다. '테오야, 미안하다. 나는 너의 영원함 짐이구나!' 고흐의 사망은 여전히 미스터리지만 제 마음의 나침반은 '영원한 부채 의식' 쪽으로 움직입니다.

고흐 사망 후 6개월 만에 동생도 죽습니다. 가슴 미어지는 형제애죠. 화가들은 예나 지금이나 왜 가난한 것인지요. 오늘도 밤의 몽마르트르 언덕에선 수많은 작품들이 속삭이고 있습니다. '절 데려가 주세요.' 빈센트와 테오를 생각하고, 현재와 미래의 수많은 고흐들을 생각하는 몽마르트르 언덕. 사크레쾨르 대성당 앞 계단에 앉아 시내를 굽어보고 있노라니 오래 전 책에서 읽었던 '오줌홍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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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블레(1494~1553)가 쓴 소설에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이란 게 있어. 거인이 오줌을 눠서 홍수를 일으키는 이야기가 거기 나오는데, 원작에는 노트르담 사원의 탑으로 돼있지만, 지형 특성상 여기가 더 어울리는 것 같아…."

"처음 듣는 소설인데요?"

"중세의 신에게서 인간을 해방시키려는 이야기야. 라블레는 의사이기도 했는데 인간의 육체를 중시했어. 먹고, 마시고, 싸고, 유쾌하게 즐김으로써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점잔과는 거리가 먼, 프랑스 르네상스 문학의 꽃이지."

"아하, 육체를 중시하는 문학이라는 건 이해하겠는데 오줌 이야긴 뭐죠?"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은 김춘추 결혼 이야기 비슷한 거야. 김유신 여동생 보희가 경주 선도산에 올라가 오줌을 누니까 일대가 홍수에 잠기는 꿈을 꾸잖아. 그걸 동생 문희에게 말하니까, 동생은 언니한테 비단치마를 주고 그 꿈을 사지. 꿈 산 덕에 춘추공의 부인이 되는 거야. 나중에 왕비가 된 것도 대박인데, 아들이 삼국을 통일시키니까 결국 오줌홍수 꿈이 길몽이라는 거지."

"소설도 그런 내용인가요?"

"육체를 찬양하는 건 비슷한데 소설은 좀 짓궂어. 거인 가르강튀아가 파리 시민들에게 인사를 하러 오는데, 사람들이 귀찮게 구니까 재미 삼아 오줌홍수로 골탕 먹이는 내용이야. 그게 '파리'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 건데 줄거리는 대충 이런 거지."

'이 녀석들이 내게 도착과 환대의 답례를 하라는걸! 술 한 잔 낼까? 장난치는 정도(par ris)로 해두지 뭐. 그러고 나서 웃으면서 멋진 브라켓을 벗어 공중에 쳐들고 사람들 앞에서 황금색 비를 힘껏 쏟았다. (……) 이 녀석들 중 몇 사람은 걸음이 빨라 오줌의 홍수에서 도망쳐 땀을 흘리며 기침하고 침을 뱉으면서 숨을 헐떡이며 대학 언덕의 정상에 이르렀으니 어떤 자는 화를 내고 어떤 자는 웃어대며(par ris) 저주의 소리를 퍼부어댔다. "제기랄! 성녀(聖女) 마미 마님, 농담놀이(par ris)에 함빡 젖어버렸네요." 이러한 이유에서 이 마을은 파리(Paris)라 불리게 됐는데 이전에는 뢰세스(Leucece)라고 불렸다.'


저는 이 대목이 풍자라고 이야기해줍니다. 인간은 '신의 권위에 짓눌려 있는 작은 목숨'이 아니라 '엄청난 육체를 가진 우주적 거인'이란 걸 작가가 우스꽝스럽게 표현했다고 강조하는 거죠. 파리가 '유쾌한 농담과 웃음의 도시'라는 어원설도 함께 말합니다.

"파리시를 우리 식으로 바꾸면…, '우스꽝시'가 좋겠네!"

"우스꽝시요?"


깔깔거리며 좋아하는 그녀. 재미나는 이름이 탄생하는 순간이군요. 밤 10시. 에펠탑의 조명 쇼가 시작됩니다. 갑자기 불빛들이 반짝거리고 레이저가 하늘을 휘젓습니다. 저 거침없이 씩씩한 레이저. 영원을 향해 가는 고흐의 눈빛 같기도 하고, 암흑시대의 신을 향한 가르강튀아의 삿대질 같기도 합니다. 그걸 흉내라도 내듯, '물랭루주' 카바레 같은 데에선 프렌치 캉캉 댄서들이 하늘로 하늘로 다리를 치켜들기도 할 테죠. 어느 시대의 인류가 이리 용감할까요. 우스꽝시의 가랑이 삿대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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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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