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순환출자 가이드라인 개정…재계 “정부-기업간 심각한 신뢰 훼손”
삼성SDI 보유 삼성물산 지분 400만주, 6개월내 매각 결정
[아시아경제 명진규 기자] 공정거래위원회가 구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 과정에서 발생한 순환출자 변동에 대한 유권해석 과정에서 당시 법해석이 잘못됐다며 삼성SDI가 보유한 삼성물산 지분을 매각하라고 조치해 재계에 논란이 일고 있다.
가이드라인까지 고쳐가며 삼성을 상대로 한 표적 재심의라는 지적과 함께 시정조치의 단초가 항소심이 진행중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1심 판결 과정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과거 이미 판단한 내용을 재심해 소급적용 했다는 점에서 정부와 기업들의 신뢰 관계 역시 손상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1일 순환출자 변동에 따른 가이드라인을 개정하고 구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과정에서 해당법 적용이 잘못됐다고 판단, 삼성SDI가 보유한 삼성물산 지분 약 404만주(지분율 2.11%)를 매각해야 한다고 밝혔다. 유예기간은 6개월이다.
◆재계, 삼성에 소급적용은 ‘심각한 신뢰 훼손’ 지적=과거 합병 당시 공정위는 구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과정에서 발생하는 순환출자 변동이 발생한 만큼 신규 순환출자를 금지하는 법조항에 따라 이를 해소하도록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삼성측은 합병으로 인해 일부 순환출자 구조가 강화됐지만 합병에 따른 불가피한 상황이었다는 점, 삼성그룹의 전체 순환출자 고리수 자체는 줄어든다는 점을 들어 당초 900만주 매각에서 총 500만주만 매각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공정위는 신규 순환출자 금지 규정과 관련한 2015년 당시 만든 가이드라인이 절차적 하자가 있다는 이유로 이를 개정, 삼성그룹의 경우 소급적용 하기로 했다. 공정위는 국정감사에서 해당 문제를 지적 받았다는 점을 가이드라인 개정의 이유로 설명하고 있지만 재계는 삼성그룹을 겨냥한 표적 재심의라는 지적이다.
재계 관계자는 "합병이 끝난지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지금에 와서 당시 공정위의 판단이 잘못됐다며 가이드라인을 개정하고 이를 소급적용까지 한 것은 정부와 기업간의 심각한 신뢰 훼손"이라며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다고 설명하지만 결국 기업만 일방적으로 피해를 보게 됐다"고 말했다.
◆“이재용 부회장 1심 결과로 예단, 공정위 성급하다” 지적도=공정위는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1심 판결문을 들어 당시 삼성측의 청탁이 성공했다고 간주하고 소급적용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정상적인 판단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현재 항소심이 진행중인만큼 삼성측의 청탁이 있었고 성공했다는 점은 최종 판결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정위가 지나치게 서두르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재계 관계자는 "항소심이 진행중인 사안의 1심 판결을 놓고 소급적용을 서두르는 이유가 뭔지 궁금할 정도"라며 "확정판결이 아닌데 이미 공정위는 해당 재판에 대한 최종 판결문을 써 놨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라고 말했다.
정부와 기업간의 신뢰관계가 깨어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과거에 판단이 끝난 문제를 다시 되짚기 시작하면 기업 입장에선 불확실성만 가중시킨다는 얘기다. 가이드라인 개정이야 그럴 수 있다 해도 기업에 벌을 주듯 소급적용을 할 경우 행정소송이 줄을 이을 수 있다.
공정위는 "삼성입장에서는 기존 신뢰가 침해됐다는 점을 바탕으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지만 공정위는 과거 잘못을 바로 잡아 공정한 경제질서를 만들 책무를 이행한다"면서 "만약 삼성이 소송을 제기한다면 이에 대한 판단은 최종적으로 법원의 몫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계열사 블록딜도 불가, 삼성물산 주가 하락으로 주주들 피해만=삼성측은 이번 공정위의 결정에 대해 "서운한 생각은 있지만 공식적으로 내 놓을만한 답변은 없다"고 밝혔다. 전자계열사의 업무를 조정하는 '사업조정TF'가 있지만 과거 미래전략실처럼 그룹 이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아 답변을 할 주체도 모호하기 때문이다.
삼성SDI는 현재 보유한 삼성물산 지분 약 404만주를 6개월안에 매각해야 한다. 때문에 증권가는 블록딜이 유력할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도 여의치 않다.
삼성그룹 계열사들이 해당 지분을 살 경우 기존 순환출자가 강화되거나 상호출자, 신규 순환출자가 형성되는 만큼 이번 가이드라인을 다시 위반하게 된다. 삼성그룹 오너 일가가 해당 지분을 사는 방법도 있지만 단기간에 5000억원이 넘는 재원 마련도 쉽지 않다.
증권가 관계자는 "삼성물산의 주가 하락이 우려된다"면서 "과거 합병 당시 500만주에 달하는 지분 매각의 경우 삼성그룹에서 예상했던 바로 대비책을 세울 수 있었지만 이번 명령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만큼 시장에 가져오는 충격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계열사가 블록딜 하는 방안이 시장의 충격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계열사가 주식 매입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며 "제 3의 블록딜 주체를 찾아야 하는데 단기간에 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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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소송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 부회장의 항소심이 진행중인 상황인 만큼 명확하게 나설 주체가 불분명하다기 때문이다. 삼성측은 "어느 회사, 어느 부서에서 이 문제에 개입해야 할지 정하지 못한 만큼 행정 소송 관련해서도 현재 할 말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한편, 삼성SDI가 삼성물산 지분을 전량 매도해도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오너 일가와 지분율이 높은 만큼 지배구조에 변동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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