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굣길에 비가 온다는
 우산 수리 전문가의 예언이 적중했다
 그가 우산을 건네자
 끝말잇기를 하듯 빗방울이 떨어진다
 엊그제 비를 맞으며 나와 함께 등굣길을 나섰던 우산 한 개가 아직 돌아
 오지 않았다고 그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는 날마다 고장 난 우산을 수거하고
 그는 날마다 고장 난 우산을 수리한다
 그가 수리한 우산의 팔구십 퍼센트가 나를 위해 쓰였다

 한번은 다 저녁에 예고도 없이 소나기가 퍼부었는데
 당황한 우산 수리 전문가가

[오후 한 詩]우산 수리 전문가/임경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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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속을 뚫고
 학교까지 나를 찾아와 불쑥 우산을 건넸다


 비 맞고 다니지 말아라

 돌이켜보니,
 배후에 우산 수리 전문가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우울한 세계에서
 비 한 방울 맞지 않을 수 있었다


 저녁상을 물린 우산 수리 전문가가 툇마루에 앉아
 구름의 방향과 색깔을 살피고
 바람의 냄새를 맡는다
 새로 수리할 우산을 펼쳐 빙글빙글 돌린다
 작년보다 잔 고장이 더 많아진 그가 우산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일기예보에 내일 비가 올 확률은
 팔구십 퍼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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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게 하기'는 꽤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유효한 여러 문학적 신념들 가운데 하나다. 그 뜻은 글자 그대로다. 대상을 친숙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이 시에서 낯설게 처리된 대상은 "우산 수리 전문가"로 적힌 (아마도) '아버지'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리고 대부분 동의하듯이, '낯설게 하기'는 미적 장치라기보다는 지각 과정을 교란하고 지연시키는 기제다. 그러함으로써 '낯설게 하기'는 그 대상에 대한 인식을 뒤집거나 대상 속에 오래 머물도록 하여 미처 깨닫지 못했던 부면을 전면화한다. 그리고 그것이 곧 시적 울림을 형성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아버지는 단지 다정하고 고마운 사람이 아니라, 평생 내 "배후"에서 "고장 난 우산을 수리"해 온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이 우울한 세계에서" "비 한 방울 맞지 않을 수 있었다". 탁월하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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