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온유의 느.낌.표] 나는 가드너입니다
[아시아경제 임온유 기자] 안국역 1번 출구를 나와 삼청동 카페골목으로 향할 때면 꼭 지나치는 꽃집이 있다. 가게 문을 열면 왠지 모르게 사는 게 예의란 생각에 늘 테라스에 놓인 말린 꽃들로 눈요기를 하곤 했다. 가끔 친구 옆구리를 쿡쿡 찔러 말린 꽃을 선물 받기도 한다.
지금 우리 집 파란 현관문에는 보라색 천일홍이 꽂혀 있다. 1만 원짜리 말린 꽃 하나에 현관문의 분위기가, 그리고 방 공기가 달라지고 집을 나서는 내 마음이 즐겁다니. 꽃이 주는 일상의 즐거움은 어떤 약보다 신통한 것 같다.
'말린 꽃의 약효가 이러한데 하물며 살아있는 꽃을 매일 보고 사는 가드너는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해본다.
그런데 민음사의 새책 '나는 가드너입니다'의 책장을 넘기면서 그리 낭만적이라고만 생각할 것도 아닌 듯했다. 이 책은 저자인 박원순 가드너가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의 서쪽에 있는 '롱우드가든'에서 일하며 체험한 가드닝과 사계절의 정원에 대한 에세이다. 저자는 지금 에버랜드에서 사계절 꽃 축제를 기획, 디자인하고 새로운 식물을 찾아 키우는 일을 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가드너는 매일 같이 물 위에 뜬 부유물을 건져내는 건 기본이고, 잎에 까맣게 모여든 진딧물을 없애는 등 식물의 온갖 뒤치다꺼리를 해내는 일꾼이다. 오래된 수련의 화분 속에서는 말할 수 없이 고약한 냄새가 뿜어져 나오기도 한단다. 더 크고 화려한 꽃을 위해 꽃대를 잘라 꽃들의 생식을 막는 얼핏 이기적으로 보이는 일들도 한다.
롱우드가든에는 정원이 열 개 있는데 저자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곳들을 오가며 아이처럼 왕성하게 생육하는 식물들을 돌보았다. 이쯤되니 가드너를 꽃만 보고 사는 사람이라 여긴 내 생각이 퍽 순진하게 느껴진다.
취미가 일이 되면 행복감을 뺏기게 마련이라는데, 저자는 그래서인지 매일 저녁 손님이 되어 사진기를 챙겨들고 롱우드가든으로 향했다. 백합과에 속하는 덩굴식물 '글로리오사 수페르바', '포인세티아', '보라색 칼라디움', '펠라고늄'. 책 한 편을 차지한 낯선 꽃들의 사진은 모두 이때 탄생한 듯하다. 꽃도 꽃이지만 가드너인 만큼 저자는 스스로 가꾼 정원을 바라보는 이들의 뒷모습을 구경하는 기쁨도 컸다고 한다.
저자는 빅토리아 수련의 신비스러움으로 가득했던 '물의 정원'을 가장 사랑했다. 이곳은 여름에 가장 매력적이라 '여름의 정원'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틀 동안 활짝 피는 빅토리아 수련은 첫째 날과 둘째 날 색깔이 달라지는 신비스러움이 있다고 한다. 책은 이외에도 초록의 '고사리정원'을 통해 고생대부터 전해진 단순함의 미학을 전하고 가을에 가장 왕성히 번식하는 '지중해 정원', 가장 자연에 가까운 봄의 정원 '우드랜드가든'을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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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정원이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 깊숙이 자리할 거라고 이야기했다. "세상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지만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삶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긴 어렵다. 그중 하나는 바로 식물을 기르는 가드닝에 대한 원초적 본능, 더 나아가 자연을 경작하여 보다 조화롭고 매력적이며 창조적인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욕구다."
<나는 가드너입니다/박원순 지음/민음사/1만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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