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희 북 칼럼니스트·고려대 미디어학부 강사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고려대 미디어학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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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도 유행이 있다. 한창 왕성하게 쓰이던 말이 시대가 바뀌면서 슬그머니 뒷전으로, 그야말로 사전 속에서나 만나게 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개그맨이나 유명 인사가 한 유행어가 아니라도 인기 드라마나 영화 대사, 광고의 명 카피가 아니라도 그렇다.


'와이로'란 말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디서 비롯된 말인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때는 그야말로 일상어였다. 치맛바람이 위세를 부리던 시절 이야기다. 같은 반 어머니가 선생님을 만나고만 가도, 한 친구가 어느 날 앞자리로 옮겨가도, 담임선생님이 줄반장으로만 지명해도 아이들끼리 '와이로'를 줬다고 수군거리곤 했으니까. 그러니까 '와이로'는 뇌물이라 하기엔 적은 금품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범죄라 할 것까진 아니지만, 편의를 제공해 주십사 하는 '성의' 표시였다. 이 말이 어느 샌가 사라졌다. 와이로가 '촌지'라는 제법 번듯한 모양새를 취하기도 하고, 경제발전에 발 맞췄는지 단위가 커지면서 '뇌물'로 바뀐 탓이 컸다.

1970~80년대 언론을 장식했던 '현실화'도 사라진 말 중 하나다. 당시엔 정권의 권위에 누를 끼치는 말을 쓰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가격 인상'이니 '물가 상승'이니 하는 말을 신문이나 방송에서 쓰지 못했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 모르지만 인상이나 상승 대신 쓰인 말이 '현실화'였다. 현실에 맞춘다는 이 말은 그러니까 정권의 체면을 살려주면서 언론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쓰인 완곡어법이었던 셈이다. 민주화에 맞춰 용어의 사용도 '현실화'하면서 자연스레 '현실화'는 용도 폐기됐다. '인상' '상승'은 물론 급등, 폭락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좋은 세상이 온 덕분이다.


생활의 변모에 따라 쓸모가 확 줄어든 안타까운 낱말들이 떠오른다. '우두커니' '명랑'이 그런 예다. 문학을 가까이하지 않아서인지 '우두커니'를 만날 일이 좀처럼 없다.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사어(死語)가 된 느낌을 받는다. 정신없이 몰아치고, 잠시라도 멈춰 있으면 뒤처지는 꼴이 되는 세태 탓이 아닐까 짐작할 따름이다. '몰입'이 화두가 되고, 퇴직 후에도 '인생 이모작'을 꾀해야 하는 마당이니 '넋이 나간 듯이 가만히 서 있는' 것은 용납이 될 리 없다. 이와 비슷한 '물끄러미'도 비슷한 처지로 보인다. '하염없이'는 에세이에서 종종 만나지만 말이다. '명랑'은 또 다르다. 결혼 취업 등을 포기하는, 아니 포기 당해야 하는 '3포세대' '5포세대'가 등장하고 '헬조선'에 '이생망'이란 말까지 오가니 '명랑'이 쓰일 데가 좀처럼 없다. '흐린 데 없이 밝고 환한' 날이 드물고 '유쾌하고 활발한' 일이 적으니 명랑을 쓸 일이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말의 성쇠를 부채질 하는 게 정치판이다. 정치라는 게 말로 이뤄지는 덕분인지 말을 만들고 띄우고 죽이는 데는 연예계보다 더 고수다. 60년대 사쿠라에서 "민나 도로보데스"가 정치권이 띄운 말로 얼른 기억난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내로남불'처럼 기막힌 히트작이 나오기도 한다. 언론학에선 이를 '프레임 이론'이라 해서 인식의 틀을 선점하는 방식과 그 효과, 한계를 설명하지만 결국은 논전에서 이기기 위한 말장난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최근엔 '화이트리스트'가 등장했다. 전 정권에서 맘에 들지 않은 문화예술인들에게 불이익을 주기 위해 만들었다는 '블랙리스트'에 맞서는 말이다. 즉, 전 정권에서 이득을 본 문화예술인 명단이란다. 실재 여부가 의문스럽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것 역시 누군가의 맘에 들지 않는 이들을 적으로 규정하기 위한, 그래서 반사적 이익을 얻으려는 누군가의 '언어유희'일 수도 있다. 다음엔 어떤 리스트가 등장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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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조어, 유행어가 어지럽게 명멸하는 세상.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는 옛 시인의 명구가 생각나는 요즈음이다.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고려대 미디어학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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