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가 돼도 배식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가…." 집 베란다에 마련된 결전의 현장, 전투 대형을 갖춘 이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앞을 응시했다.


'붉은빛 파편'이 튀는 것을 막고자 앞치마도 준비했다. 고무장갑으로 손부터 팔꿈치까지 방어막을 형성했다. 산처럼 쌓인 '김장 양념'은 이미 붉게 이글거리며 위협적인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자칫하면 옷은 물론 얼굴까지 양념 파편의 붉은 기운에 물들 수 있다.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눈물겨웠던 지난 시간이 떠올랐다. 전쟁에 필요한 '군수품' 마련을 위해 뛰어다녔던 그 시간들이다. 김치 맛을 좌우하는 복병, 질 좋은 새우젓을 확보하고자 강화도 외포리 선착장으로 달려갔다. 수많은 행렬을 뚫고 속이 탱탱한 '육젓'을 확보했다. 여러 장의 '배춧잎'으로 비용을 치렀지만, 김치맛을 좌우하는 핵심 양념을 확보했기에 전혀 아깝지 않았다.


쪽파 확보를 위한 행군은 또 하나의 전쟁이었다. 유난히 무더웠던 올해 날씨 때문인지, 쪽파값도 대폭 뛰었다. 한 단에 9000원, 놀라운 가격에 잠시 멈칫했지만 비용을 아낄 수는 없었다. 과감한 선택이 가능했던 이유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붉은 기운의 원천, 고춧가루를 미리 확보한 데 따른 자신감이다. 추석 명절, '장모님 찬스'를 통해 고춧가루를 마련한 뒤 11월 김장을 준비했다. 김장 양념은 그렇게 탄생했다. 고춧가루와 무채, 쪽파, 갓, 새우젓, 멸치액젓 등을 버무려서(사실 이때가 가장 중요하고 힘이 드는 과정이다) 산처럼 쌓인 김장 양념을 만들었다. 한쪽에는 상자당 20㎏ 중량의 절임배추 다섯 상자에서 나온 오늘의 주인공이 또 하나의 산을 이루고 있다.


만약 김장 양념이 부족한 상황이 발생하면 다시 갓, 무채, 쪽파 등을 확보하고자 마트로 달려가야 한다.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 무엇보다 전투 대원들의 사기저하가 걱정이다. 반드시 배식에 성공해야 하는 이유였다.


드디어 배식은 시작됐다. 절임배추 잎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붉은빛 양념을 투입했다.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게, 절대로 배식에 실패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며 작전에 임했다.


전투 중 돌발상황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나자 붉은빛 파편을 막아주던 보호막에 문제가 생겼다. 어깨에 걸친 앞치마 끈이 흘러내리고, 양팔을 보호하던 고무장갑도 자꾸 밑으로 말려 들어갔다. 이미 얼굴 몇 곳에 붉은빛 파편이 튀고 말았다. 하지만 고지가 멀지 않았기에 후퇴할 수는 없었다. 어느덧 산을 이루던 절임배추도 절반 이하로 줄었다.


그러던 도중 새로운 명령이 떨어졌다. 배식 실패를 우려해 조금씩 양념을 넣었던 초기 대응을 수정해 적당히 양을 늘려 속을 채우라는 명령이다. 작전변경은 성공적이었다. 마지막 절임배추의 속을 채울 무렵, 산처럼 쌓여 있던 김장 양념도 바닥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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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주방 쪽에서 흘러온 돼지고기 수육의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육을 보니 침샘은 즉각 반응했고, 입안은 이미 요동쳤다. 김장 전투의 승전고가 울려 퍼진 상황, 어찌 축배의 한 잔이 빠질 수 있겠는가. 술잔 넉넉하게 막걸리를 붓고 '쨍그랑' 소리 내어 건배하고 나니 김장 전투의 피로는 눈 녹듯 사라졌다. 막걸리에 수육 안주, 넉넉한 웃음까지 함께 하는 장면, 그게 바로 일상의 행복 아닐까.


류정민 산업부 차장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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