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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재 논설위원의 책 다시 보기]미국 헌법과 인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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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헌법과 인권의 역사

미국 헌법과 인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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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미국 헌법과 인권의 역사’는 미국 연방대법원의 주요 판결들을 통해 미국 사회에 법치주의가 뿌리내린 과정을 조명한다. 그 법치주의의 기둥은 ‘인권’과 ‘민주주의’다. 이 책은 이 판결들이 ‘사실상 미국을 미국답게 만들어온 판결’이며, 미국이 강한 이유도 이들 판결과 같은 과정을 통해 ‘헌법을 헌법답게 만들어온’ 데 있다고 말한다.

미국의 헌법에서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중요한 이유는 미국 헌법의 독특한 이중적 성격에서 비롯된다. 미국의 헌법은 성문헌법과 불문헌법이 혼합돼 있다. 1787년에 채택되고 1788년에 발효된 미합중국헌법전이 성문헌법이지만 미국 각급 법원, 특히 연방대법원이 헌법의 해석을 통해 무수한 불문헌법을 지속적으로 ‘창조’해 왔다. 그래서 미국에서 성문헌법전은 상징적 형식적인 존재에 불과하며 심지어 "판사가 헌법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헌법이다"라는 말까지 회자된다.
연방헌법과 연방대법원의 판결은 미국을 하나의 나라로 묶어주는 데서도 구심점 역할을 한다. 50개의 주로 구성돼 저마다의 제도와 법을 가진 별개의 나라처럼 운영되면서도 헌법에 근거한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통해 미국 사회의 공통의 진로가 제시되고, 특히 인권과 민주주의의 보호와 신장이 이뤄져 온 것이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22개의 판결들은 그런 점에서 그 하나하나가 미국의 역사이며 미국 민주주의와 인권의 발전사를 보여주는 것이다. 대통령의 특권은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보다 앞서는가, 대통령 비상조치권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최저임금법은 노사간의 계약의 자유를 침해하는가, 정부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국기를 태울 수 있는가, 음란물의 기준은 무엇인가, 컴퓨터통신에서 음란성 표현을 제한할 수 있는가, 동성결혼은 헌법에 배치되는가 등등의 주제들이다.

한편으로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과 달리 미국의 헌법과 그 적용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도 일고 있다. 권위 있는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미국헌법과 민주주의’에서 “미국 헌법은 과연 민주적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미국 헌법을 현대 민주주의를 정초(定礎)한 하나의 모델로 이해하는 기존의 통념에 대해 달은 미국인들의 ‘착각’일 뿐이라면서 미국 헌법의 비민주적인 요소들이 오늘날의 미국 정치를 비합리적으로 만드는 중대한 제약이 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달은 특히 사법부의 판례가 헌법의 민주화에 지대한 기여를 해 왔음에도 사법부가 지나치게 정책결정과정에까지 관여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헌법을 해석함에 있어 판사들은 자신의 이데올로기나 편견, 선호를 개입시킬 수밖에 없는데, 선출되지 않은 기구, '숨어 있는' 연방대법원 판사 9명에게 미국인들의 삶과 복지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의 결정권을 맡긴다는 사실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달이 비판하듯 연방대법원이 얼마나 신성불가침의 성역으로 외부인의 시선으로부터 완벽히 차단된 공간인지는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종보도한 밥 우드워드의 저서 ‘지혜의 아홉기둥’과 같은 책에서도 알 수 있다.

이 같은 미국 헌법과 사법부에 대한 점증하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사법부의 판례를 통해 헌법이 제시하는 기본권 보장의 확대와 평등권 강화를 통해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점에서 헌법의 정신과 취지를 끊임없이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 그 같은 작업에 있어서 사법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잖다.

우리 사회에서도 헌법에 대한 논의 자체는 적잖은 편이다. 1948년 7월17일 제헌국회에서 건국 헌법이 제정된 이후 총 9차례에 걸쳐서 개정되었던 역사부터가 헌법을 둘러싼 많은 논란과 갈등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우리의 헌법 관련 논쟁은 대체로 권력구조, 즉 대통령제냐 내각제냐 등에 집중된 정치권 중심의 논의인 경우가 많았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헌법에 대한 관심과 논의는 넘치는 듯하면서도 빈약한 상황이라고나 할까.

몇 년 전 유시민씨가 헌법에 대한 저서 ‘후불제 민주주의’를 내면서 ‘헌법 읽기’를 제안한 적이 있다. 그는 “지금 우리가 가장 근본적으로 점검하고 환기해야 할 모든 원칙과 이상들이 다 헌법에 들어 있다”고 말했다. 헌법 읽기가 필요한 것은 “그 원칙과 이상이 헌법조문 속의 활자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즉 대한민국 헌법은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손에 넣은 일종의 '후불제 헌법'이었다는 것, 그 '후불제 헌법'이 규정한 민주주의 역시 나중에라도 반드시 그 값을 치러야 하는 '후불제 민주주의'여서 헌법이 규정한 민주적 질서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 반드시 치러야 할 비용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헌법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부터 민주주의와 헌법이 더욱 명실상부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헌법의 조문 하나하나가 얼마나 강력한 위력을 가졌는가를 멀리 미국 사법부의 판결에까지 가서 찾을 필요는 없다. 예컨대 ‘경제민주화’ 조항이라고 흔히 얘기되는 우리의 헌법 119조 2항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공방을 생각해 보면 된다.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찬성하든 반대하든 그리 길지 않은 이 문장에 담긴 천금의 값을 '후불'로라도 치르는 것, 그건 사법부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장호순 지음/개마고원/2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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