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과 원숙미의 완벽한 앙상블
마약에 절어 지내던 시절 돈이 궁해진 그는 분신과도 같은 기타를 맨해튼 48번가에 있는 악기점에 팔았다. 후일 그 기타를 찾았지만 이미 팔린 뒤였다. 1962년산 펜더에 PAF 픽업을 둘 박아 넣은 그 기타는 현재 김종진(봄여름가을겨울)이 갖고 있다. 찬란하던(그리고 날씬하던) 시절의 분신을 잃은 하이럼 블락을 보면 뭔가 연민이 든다. 한국 무대에 선 그는 자신의 시그니처 모델인 HBS를 들고 연주하고 있었다. 옛 기타의 가치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는 물건이다. 그러나 연주가 계속될수록 그 연민은 곧 감탄과 몰입으로 바뀌었다. 그 날의 연주와 기타 톤은 젊은 시절의 소리에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블락은 기타리스트로서의 자아를 욕심껏 내뿜는 대신 멜로디와 한 음악 자체에 집중한다. 첫 곡 ‘카페 루나(Cafe Luna)’에서는 펑키한 리듬 속에 멜로디가 후룸라이드처럼 미끄러지고, ‘Window 2 K’의 연주는 젊은 시절보다 한층 절제되었지만 특유의 서늘하고도 쫄깃한 기타 톤에서 긴장감이 넘친다. 강렬한 디스토션을 내세운 ‘허리케인(Hurricane)’의 록적인 느낌과 끈적끈적한 기타 톤이 일품인 ‘이프 식스 워즈 나인(If 6 was 9)’은 블락의 폭 넓은 음악적 스펙트럼을 대변한다.
열정과 원숙함은 수록곡의 성격들에서도 잘 드러난다. ‘기브 미 원 리즌(Give me One Reason)’의 시원한 리프가 돋보인다. 보컬도 훌륭하다. 특유의 낮고 걸쭉한 목소리가 화끈하게 몰아친다. 하이럼의 설명처럼 “미친 사랑 노래(It’s not a ex love song, It’s not a true love song, It’s a crazy love song)”인 ‘아임 유어 풀 투나잇(I'm Your Fool Tonight)’의 열정도 감동적이다. 타자를 향한 진심을 열렬히 토로하다가도 ‘컬러 미(Color Me)’에서 심연의 민낯을 드러낸다. “난 완벽한 사람은 아니야, 분명 실수들을 했겠지(I'm not a perfect man, Mistakes made I'm sure)”라는 거장의 자기고백은 찡하게 다가온다. 그의 힘들었던 젊은 날을 생각하면 더더욱. 신나고 열렬하며 매끈한 수록곡들 사이에서, 아이로니컬하게도 가장 수수한 이 곡이 가장 감동적이다.
■ '서덕의 디스코피아'는 … 음반(Disc)을 통해 음악을 즐기는 독자를 위해 '잘 알려진 아티스트의 덜 알려진 명반'이나 '잘 알려진 명반의 덜 알려진 아티스트'를 소개하는 코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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