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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희의 전시포커스]꿈엔들 잊힐리야 고국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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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화가 변월룡展…5월 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변월룡 작, '모내기', 1955년작

변월룡 작, '모내기', 1955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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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서 태어난 사회주의 리얼리즘 화가
1953년 北 파견, 15개월간 인물·풍경 그려
소련 복귀 후 고국 그리워하며 작품활동
1994년 문영대씨가 러미술관서 그림 발견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 햇살 따스한 오후, 소녀가 옅은 미소를 띠며 집 마당 모퉁이에 앉아 정면을 응시한다. 빨간 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입은 소녀의 분홍빛 볼이 정답다. 평양 대동 강변엔 아름드리 버드나무 이파리가 바람을 맞아 살랑거린다. 빨래터로 나온 아낙들이 아이들과 옹기종기 모여 있다. 농촌에서는 모내기가 한창이다. 긴 담뱃대를 문 노인이 벼를 심느라 분주한 여인들과 사내를 가까이서 바라본다. 막걸리를 나누기 바쁜 이들도 있다.
러시아 고려인 화가 변월룡(1916~1990년, Pen Varlenㆍ펜 봐를렌)이 북한에서 마주한 모습들이다. 변월룡은 지난 1953년부터 1954년까지 약 15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고국 땅에 머무르며 여러 사람과 풍경을 만났고, 이를 그림에 담았다. 북한 조류학자 원홍구 박사, 승무를 추는 무용가 최승희의 초상, 운무로 보랏빛 몽환을 자아내는 금강산 아래 홀로 선 키 큰 소나무 풍경 등이 보인다.

변월룡은 연해주에서 태어나 상트페테르부르크(구 레닌그라드)에서 미술교육을 받고, 화가와 교육자로 일생을 보낸 고려인이다. 디아스포라(Diasporaㆍ이주민)였지만, 소련 사회에서 엘리트 화가로 인정받았고 초상화가로도 유명했다. 국내에 한 번도 소개되지 않은 변월룡의 개인전이 열렸다. 대규모 회고전으로 서울 중구 세종대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관에서 3일 개막해 오는 5월 8일까지 이어진다.

양지의 소녀 1953년작, 빨간 저고리를 입은 소녀 1954년작. (왼쪽부터)

양지의 소녀 1953년작, 빨간 저고리를 입은 소녀 1954년작. (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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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산 소나무, 1987년

금강산 소나무,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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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께서 우리 마을에 오셨다,1964년,에칭

레닌께서 우리 마을에 오셨다,1964년,에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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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월룡이 세상을 떠난 뒤 그가 수학한 '일리야 레핀 레닌그라드 아카데미'에서 에칭 작품을 중심으로 개인전이 개최된 적이 있다. 생전 작가는 일 년에 일고여덟 차례 그룹전에 참여할 만큼 왕성하게 활동했다. 러시아에서는 개인전이 드물고, 주로 그룹전이 열렸다. 이런 풍토 때문에 그의 다양한 장르의 회화 작업을 한데 모아 보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 전시에 등장한 작품 200여점은 러시아의 아카데미즘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엿보게 하지만 작가만의 창작 영역인 '초상화'도 돋보인다. 몇 번의 붓질만으로 인물의 개성을 잡아내는 직관과 관찰력이 인상적이다. 여기에 그가 남긴 '평양 기행' 그림은 한국 미술사에서도 조명 받아야 할 부분이다.

변월룡은 지난 1953년 7월 소련 문화성의 명령으로 평양미술대학 재건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을 위해 북한에 파견됐다. 물론 당시 북에 파견된 유일한 소련화가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어가 모국어였던 그는 북한의 예술가들과 깊게 교류했고 조국의 산천과 소박한 일상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급성이질에 걸리는 바람에 계획보다 앞당겨 러시아로 돌아간 뒤 작가는 조국 땅을 다시 밟지 못했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이 죽고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집권하면서 소련과 북한의 관계가 냉랭해졌기 때문이다. 대신 북한에서 만난 문학수, 정관철 등 여러 화가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북한 풍경과 인물을 그리면서 그리움을 달랬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사는 작가의 유가족이 이번 개인전을 기회 삼아 한국에 왔다. 변월룡이 같은 아카데미의 동급생인 제르비조바와 결혼해 얹은 차남 펜 세르게이씨(64)와 딸 펜 올가씨(58)다. 작가의 가족은 아내도, 자녀들도 모두 그림을 그리는 화가 집안이다. 세르게이씨는 바다 풍경을 주로 그리는 화가이자 대학교수, 올가씨는 화가이자 그래픽ㆍ북 디자이너다. 올가씨는 "아버지는 아카데미 교수, 학생들과 교류를 많이 했다. 조용하고 인자하셨고, 사교적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 초상화를 그리며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어가 모국어여서 러시아어를 쓰면서 약간 틀린 발음도 있었고, 오빠가 뭔가 잘못해 야단칠 때나 음식 이야기를 할 때 한국말을 많이 섞었다"고 했다.

세르게이씨의 기억엔 아버지 변월룡은 아침에 강의하고 들어와 화실에서 작업한 후 점심 먹고 또 오후에 강의하고 화실에서 작업했다. 아버지 화실이 놀이터나 다름없었던 이들은 "화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아버지가 그림 그리는 모습 많이 봤고, 우리를 야외로도 많이 데려가 그림을 그렸다. 우리들이 화가 아닌 직업을 상상할 수 없었던 이유"라고 했다.

유족인 차남 세르게이씨(왼쪽)와 막내딸 올가씨

유족인 차남 세르게이씨(왼쪽)와 막내딸 올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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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월룡이란 고려인 화가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미술평론가 문영대씨(56)다. 문씨는 지난 1994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사범대학에서 유학할 때 국립러시아미술관에 전시된 변월룡의 인물 그림을 발견했다. 그는 한국인이 그린 그림임을 직감했다. 문씨는 그림을 그린 화가의 삶을 추적해 나가다 유족들을 만났다.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고국을 그리워하다 묘비명을 한글로 써달라고 했던 화가의 심정도 알게 됐다. 변월룡이 유복자로 태어났으며, 그의 부친이 연해주에서 호랑이 사냥꾼으로 유명했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문씨에 따르면 연해주 고려인들이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던 시절, 변월룡은 우랄산맥 부근의 예카테린부르크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기에 강제이주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가족들과 생이별해야했다.

문씨는 "한국에서 변월룡을 기리는 전시를 열기 위해 지난 2004년 유족들로부터 작품 200여점을 전달받았다. 하지만 실제로 개인전을 개최하기까지는 긴 세월이 필요했다. 국내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품을 전시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며 "변월룡은 러시아에서 초상화로 자수성가한 화가이자 엘리트로 살아갔지만 방학만 되면 자신이 태어난 곳이자 북한과 인접한 연해주로 갈 정도로 늘 고국을 그리워했던 사람"이라고 했다. 세르게이씨는 "문영대씨가 18년이란 긴 세월 동안 한 화가에 대한 관심을 간직하고 전시를 열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주었다. 서울 한복판 마지막 황제의 거처였다는 덕수궁에 아버지의 작품을 전시하게 돼 감명을 받는다"고 했다.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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