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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두향에게 '혹애일매'를 써주다(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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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78)

[千日野話]두향에게 '혹애일매'를 써주다(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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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또한 남자와 다르지 않으며, 천하를 움직일 경륜을 지닐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하네. 다만 음양의 이치와 세상의 분별 또한 필요한 것이지. 오랫 동안 많은 지혜로운 이들이 생각을 모으고 정리하여 이뤄놓은 인간세상의 핵심질서이니까 말일세. 그대와 나는 천하의 벗으로서 후련히 소통할 수 있으면서도 하늘과 땅처럼 서로 조응하며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지. 낙매일(落梅日)에 갖는 사랑의 마음은, 초매일(初梅日)에 가졌던 마음보다 훨씬 그윽하고 아득하도다."

두향은 다시 거문고를 안고, 고려 충렬왕 때 시인 안축의 '사시홍(四時紅)'을 읊는다.

춘천조모우연풍(春天朝暮雨連風)
과안방화소지공(過眼芳華掃地空)
봄 하늘 아침저녁 비와 바람 불더니
눈 깜짝할 사이 꽃들이, 청소한 듯 지상에서 사라졌네

작유상산유일타(昨有商山有一朶)
위영행색사시홍(爲迎行色四時紅)

어제 상산에 꽃 한송이 있어
만날 때는 그 모습 사시사철 붉을 거 같았건만.

그들은 다시 일어나, 첫날처럼 맞절을 하며 경교(敬交ㆍ우러르는 마음의 교합)의 예를 갖췄다. 그리고는 서로를 가린 옷들을 걷어내고 다시 본성으로 돌아가 운우지정의 밤을 보냈다. 낙화유수(落花流水)처럼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깊이깊이 찾아냈고 흔들리는 등잔 아래 몸의 향기와 마음의 전율을 고스란히 서로 받아느꼈다.

두향의 품을 찾아들면서 이황은 오히려 평안과 적막을 느꼈다.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고, 그를 위해 모든 것을 여는 일. 이황이 사별한 부인들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깊고 절실하며 가슴이 뛰는 감정이었다. 사람이 자신에게서 벗어나 타인에게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싶은 것. 그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 그의 몸과 마음 모두를 깊이 느끼고 아끼며, 오직 한 사람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심정이 되는 것. 이 마음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가 유학의 바탕이 되는 심성으로 강조해왔던 성(誠)과 경(敬)이 여기에 온전히 숨쉬고 있지 않은가. 자기의 모든 것을 내주는 성(誠)의 마음과, 상대를 배려하고 아끼고 우러르며 사모하는 경(敬)의 마음이, 사랑을 이토록 환하게 하고 격동하게 하는 비밀이다.

"나으리." 두향이 어둠 속에서 가만히 이황을 불렀다. 그리고는 가만히 속삭였다. "일생을 바쳐 나으리만 생각하고 살 수밖에 없는 목숨이 되었습니다." 매화가 절정에서 내놓는 향기처럼 한 사람을 향해 가장 귀한 것을 바치는 지고지순(至高至純)의 고백. 이황은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눈자위가 뜨거워졌다. "아아, 나도 오직 너를 품으며 남은 생을 살아가겠구나." 저쪽에서 흐느낌이 들리는 듯 했다.

이튿날 아침, 이황은 이요루에 앉아 두향과 차를 마셨다. 사또의 명을 받은 노복이 지필묵을 가져와 곁에 놓았다. 두향이 말없이 먹을 갈았다. 그때까지도 그는 눈을 감고 단양천을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문득 붓을 들어 대자(大字) 글씨로 써내려간다.

혹애일매(惑愛一梅).

고졸(古拙)한 필세의 네 글자이다.

"혹애일매라 하옵시면…." 두향이 뭔가를 예감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매화 한 그루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뜻이니라."

"늘 사랑하는 상애(常愛)가 아니라, 뭔가에 혹하듯 빠져드는 혹애(惑愛)라 하신 뜻은…."

"두향아."

"예에. 나으리."

"내가 네게 깊이 빠져,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하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온지, 소녀 어리석어 천지분간을 못하니 좀 더 분명하게 말씀을 해주옵시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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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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